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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새롬 May 08. 2017

#4 도쿄 이방인의 도시산책

강상중의 <도쿄 산책자> 서평

  수년 전에 친구들 너댓명과 일본 오사카에 방문한 적이 있다. 알고 지내던 일본인 친구에게 오사카를 구경시켜 줄 것을 미리 주문해 두었던 터라 안내를 받으며 이곳저곳을 돌아 볼 수 있었다. 그가 오사카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오사카 베이 타워와 도톤보리 인근 오코노미야키 집이었다. 당시 나는 꽤나 당혹스러웠다. 오사카 베이 타워는 서울의 남산타워를, 도톤보리는 서울 명동 일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오코노미야키 집은 명동에도 있는 유명 일식 프렌차이즈 식당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여러 도시들이 “동아시아 글로벌화의 공시적 공간 안에 있”음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서울의 어떤 공간에서 한국만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한국에 살면서 한국의 파사드로서 한국의 도시를 바라보기가 쉽지는 않다. 도시의 수많은 공간들이 한국의 어떤 얼굴(아이덴티티)을 드러내는지 알기위해서는 “거리두기”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이방인이 된 그때서야 도처에 존재하는 고층빌딩 숲, 주요 지하철역을 점하고 있는 거대 프렌차이즈 백화점과 마트, 한켠에 자리잡은 전통시장 골목 등이 재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강상중의 <도쿄 산책자>를 읽어볼만 하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도쿄에 있는 여러 공간을 방문하되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여기에 반영된 일본 도쿄의 역사, 문화 등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한다. 도쿄 이방인을 자처하는 저자의 분석을 살피는 것은 독자들이 한국의 도시를 이방인으로서 걸어보기 전 훌륭한 준비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쿄에는 도쿄의 개성이, 그리고 서울에는 서울의 개성이 있습니다.
도쿄와 서울이 동아시아 글로벌화의 공시적인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서로 다른 도시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도쿄 산책자>의 저자 강상중(1950년생)은 재일 한국인 2세다. 구마모토 현에서 나고 자란 그는 10대가 끝나가는 무렵 처음 도쿄를 접했다. 1960~70년대의 도쿄는 ‘Japan as Number One’의 파사드에 어울리는 메트로폴리탄 TOKYO로 질주하던 때다. 그 화려한 매력은 1980년 이후 거품경제가 물거품처럼 사라짐과 동시에 “황금의 광채를 잃어버렸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지켜본 저자에게 도쿄의 화려함은 근대적 허구로 보였을 것이다. 도쿄 근대화의 대표 격인 긴자, 시부야, 하라주쿠, 아오야마를 “불안”과 “메마름”, “너무나도 도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거드름 피우는 분위기”로 파악한 데에서도 그가 가진 근대화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강상중은 1980년대 도쿄를 교외화한 지역(사이타마 현)에서 살았는데, 여기서 본 도쿄가 “살벌한 사막에 우뚝 선 엘도라도”로 보였다고 회상한다. 그가 2000년대 후반의 도쿄 29군데를 산책하며 쓴 이 글에는 전반적으로 “중성적이며 평평하고 청결한 메트로폴리탄 도쿄”를 쓸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깔려있다. 그리고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야구장, 극장, 골목과 같은 장소에 대해서는 추억처럼 낭만화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으며” 그가 생각하는 도쿄의 미래, 즉 “타자와 만나는 장소”로서의 도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강상중이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대표적인 곳은 도쿄 시부야의 ‘메이지 신궁’, 롯폰기의 ‘국립신미술관’이다. 그는 “무기질 빌딩”으로 가득찬, 모든 것이 획일화된 도쿄에서 메이지신궁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남아있는 것 자체가 다행스러운 장소라고 말한다. 여기서 현대인은 한숨을 돌릴 수 있다. 거기에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시의 편리함이나 효율성 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국립신미술관을 “현대의 성지”라고 평가하는데, 신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술은 교환 불가능함, 유일무이함의 가치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시부야, 롯폰기와 같이 글로벌 자본주의, 포스트 모던을 상징하는 거리에 신궁과 미술관이 위치한다는 사실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본다. 현대사회에서 위로와 구제, 종교를 대체할 무엇의 필요성이 절실함을 반증하한다고 보는 것이다. 장소 해석과 더불어 장소가 위치한 의미까지 짚어주는 탁월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메이지신궁


특히 도쿄 같은 대도시는 더욱 그렇습니다.
무기질인 빌딩이 즐비하고 거리도 사는 사람도 획일화되고
심신이 모두 바짝 말라갑니다.
그래서 다들 어딘가에서 마음의 따뜻함, ‘마음의 성역’을 찾는 것이겠지요.“


  강상중이 씁쓸하게 바라보는 대표적인 장소는 긴자의 ‘샤넬 긴자점’, 롯폰기의 ‘롯폰기힐스’이다. ‘사넬 긴자점’이 위치한 긴자 거리는 본래 메이지시대 문명개화의 상징거리로, 일본의 유서깊은 가게들이 모여있어 성인 부유층이 모이는 품격 높은 장소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치와 화려함에 대한 죄책감이 서려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거품경제의 붕괴와 금융자유화 이후, 승자와 패자의 구별과 차이를 거리낌없이 부각시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강상중은 긴자의 활기가 여기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넬”과 같은 브랜드는 현대사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차별화를 위한 하나의 기호로 작용하는 것이다. ‘샤넬 긴자점’은 가장 불평등한 경제시스템의 상징적으로 공간이면서도 “이 기호는 돈만 있으면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얼마나 평등한가!”라고 외치는 아이러니한 풍경을 창출하고 있다.


롯폰기 힐스


  긴자가 ‘근대(모던)’ 도쿄를 상징한다면, 롯폰기는 ‘포스트모던’을 상징하는 거리다. 강상중은 기성관념을 싫어하는 신흥 부자들이 롯폰기를 거점으로 삼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고층빌딩을 세운 것은 무척 상징적인 일이라고 본다. 롯폰기는 외국인들의 출입이 잦은 난잡한 분위기의 거리였으며, ‘정통’이나 ‘권위’는 느낄 수 없다고 한다. 몰개성을 개성으로 삼는 롯폰기는 자연스레 포스트모던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가짜에도 미학이 있고, 가짜라도 가치가 있으면 그것으로 된다. 이에 롯폰기는 “인간의 욕망을 어떤 ‘척’도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강상중이 보기에,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수직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고층빌딩, 대표적으로는 ‘롯폰기힐스’다. 종합하면, 그는 ‘샤넬 긴자점’과 ‘롯폰기힐스’와 같은 도시공간을 단순한 소비공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일본 도쿄의 근대 및 포스트모던 시대 반영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척하는 것이 전혀 없기에 인간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거리.
그것이 롯폰기라는 거리의 개성인 것입니다.


  이 외에도 강상중은 도쿄 패션가로 유명한 '하라주쿠'에서 일본의 "가와이 문화"를 발견하고 성숙과 미성숙이란 구분이 모호해진 일본의 현실을 직시한다. 또한 "오타쿠의 거리", '아키하바라'에서 그는 일본이 미국형 소비사회를 추구하며 얻은 풍요로움의 역설을 설명하기도 한다. 오타쿠 문화는 미국형 소비사회가 충족시키는 기계적인 ‘편리’ 아래 타자와 연결되는 회로가 없어지고, ‘내가 즐길 수 있으면 되지 않나’ 하는 원자화된 개인의 놀이문화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아키하바라


  강상중의 <도쿄 산책자>는 공간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공간을 제안한다. 그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향유하기 위한 긴자나 롯폰기는 “어느 시기를 경계로 결국은 졸업하게 되는 거리”이기에, 여기를 졸업한 뒤 가게 되는 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바라는 공간의 모습은 ‘도쿄증권거래소’‘쓰키지 시장’을 대비하는 부분에서 유추해 수 있다. 같은 시장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온라인화된 ‘도쿄증권거래소’와 달리 ‘쓰키지 시장’에는 “실체”가 있고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즉 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 활기가 넘치는 만남의 장소로서의 도시이다. 그가 보기에 도쿄는 “굴곡”이 없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안전하고 청결한 도시가 되었지만 그만큼 미지수도 적어졌고 거리는 “무균 상태”가 되어 어쩐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도시는 “증류수가 아니라 잡균이 득실거리는” 도시, 고층빌딩이 늘어선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도 좀 더 모호하고 열린 공간이 있는 도시, 의미가 부여되지 않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 공간의 의미를 발견하는 도시, 배경이나 과거를 짊어진 사람, 심지어 이방인까지도 끌어안는 도시다.




  <도쿄 산책자>는 도쿄의 면면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일본의 문화역사적 흐름을 꿰뚫는다는 점에서 그 탁월함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저자가 도쿄 이방인이 됨으로써 가능했다. 저자가 구마모토 현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실제 도쿄 이방인 출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도쿄와 일본 역사의 흐름, 변화, 미묘한 분위기 차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방인으로 살았던 공이 크다. <도쿄 산책자>는 문화역사적으로 민감하게 또 인문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일상적인 공간을 바라보는 데 귀감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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