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 서평
황석영의 「강남몽」은 한국전쟁 이후 30여년 간의 급격한 자본주의 근대화 시기를 조명한 소설이다. 극중 인물 박기섭은 사채업자인 최사장의 투기욕을 자극하여 부동산 투기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에 의하면, “길 가는 데 땅이 있고. 땅은 돈이 된다”
한국 근대화 시기, 토지는 얼마나 빠르게 그 값이 오를 것인가를 기준으로 가치지워졌다. 가로. 세로 격자로 분절되고, 수치로 환원된 것은 토지 뿐만이 아니었다. 그 위로 얼마나 높게 건물을 쌓아 올리는가가 계산기를 두들기는 데 빠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공간이 기하학적으로 제단되고, 철저하게 경제적 자본 증축의 수단으로 기능한 시기였다.
세계적인 학문의 흐름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성장과 도시개발에 대한 거센 흐름이 있었다. 그 속에서 지리학 연구는 도시계획에서 투자대비 효과가 높은 입지(location)를 찾는 데 열중했다. 도시개발로 인해 기존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겪는 혼란, 그 지역의 문화역사적 유산 훼손과 같은 문제들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투안(Tuan), 랠프(Relph) 등으로 대표되는 인본주의 지리학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 탄생했다.
인본주의 지리학자들이 보기에, 1960년대 ‘실증주의 지리학’은 기하학적 공간개념에 근거하여 인간을 공간소비자(결국 화폐운반자)로 추락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에 인본주의 지리학은 “장소”라는 개념을 내세워 공간이 물질적이거나 객관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인간의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했다.
<공간과 장소>(Space and Place, 1977)은 인본주의 지리학자 투안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이 책은 인간이 공간과 장소에 대해 갖는 다양한 태도와 의미를 보이고, 이것이 실증주의적 방법으로는 포착되기 힘듦을 반증한다. 그는 3년 전, 이와 유사한 주제를 가지고 <장소애>(Topophilia, 1974)를 저술한 바 있다. 두 저서의 차이는, 푸안이 서문에서 언급하였듯이, 환경에 대한 인간의 태도 및 의미를 다루고 사례들을 일관성 없이 나열한 <장소애>와 다르게 <공간과 장소>는 환경 중에서도 공간과 장소로 범위를 한정하고 사례를 인간 경험(감정에서 사유에 이르기까지)의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점이다.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경험하는가”를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공간과 장소에 대한 분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투안은 우선, 공간과 장소의 개념을 구분한다. 공간은 아직 인간의 경험과 의미가 투영되지 않은 추상적인 세계이다. 인간이 공간을 더 잘 알게 되고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 공간은 장소가 된다. ‘개방성, 자유, 위협’의 특징을 갖는 낯설은 공간은 경험을 통해 의미로 가득찬, ‘안전, 안정성’의 특성을 가진 구체적 장소가 된다. 이때, 객관적인 물질요소가 아니라 인간이 경험하는 감정 및 사유를 통해서 공간과 장소의 개념을 정립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공간과 장소의 특징을 정립한 투안의 목적이 공간과 장소의 구별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인간이 특정 공간(또는 장소)에 대하여 서로 다른, 특별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끼거나 사유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투안이 드는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광할함은 자유롭다는 감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자유는 곧 공간이다. 자유는 활동할 수 있는 힘과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광할한 느낌을 주는 주요한 요인은 문화와 경험으로 인한 환경의 해석과 평가이다. 미국인들은 서부의 열린 평원을 기회와 자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러시아 농부에게 끝없는 공간은 기회보다는 절망, 자연의 광대함으로부터 오는 억압이다.
투안에게 공간은 “문화적 평가”이다. 욕망의 수준은 사람의 공간적 만족감에 영향을 미치고, 욕망은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지기 때문이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전통적인 중국사회는 다른 수준의 공간적 만족감을 추구한다. 헤브라이 전통에서 공간은 심리적인 의미로서 “위험으로부터의 도피,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영적인 수준에서 “구원”까지 내포한다. 이렇듯 투안은 상식적으로 우리,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사례나 인용구를 제시하고, 인간이 어떤 복잡한 감정을 통해 공간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켜 왔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투안은 “공간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사회문화적 구성주의자로 남지 않는다. 오히려 투안의 독창성과 탁월함이 돋보이는 부분은 광할함과 반대되는 감정으로서 과밀함, 그리고 두 감정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분석 부분이다. 그는 과밀함을 일으키는 것을 “장신구로 가득한 작은 방”처럼 사물, 물질이 아닌 인간으로 본다.
누군가가 들어와서 본다.
곧 바로 그 피아니스트는 공간적 구속을 느낀다.
한사람이라도 그에게는 너무 많아보일 수 있다(p.102).
인간은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타인에게서 공간을 빼앗으며, 사물이 할 수 없는 이러한 힘을 타고난다. 그러나 사회가 인간에게서 이 힘을 빼앗을 수도 있다. 부자와 시종이 존재하게 하는 사회가 그 예이다. 부자는 많은 시종을 거느리더라도 과밀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 사회에서 시종은 사물만큼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과밀한 느낌을 해소하기 위하여 인간은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 투안의 분석에 의하면, 그 선택은 인간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피아니스트는 연주를 멈추고 방을 떠날 것이다. 수많은 접촉을 요약하기 위한 에티켓이 발달한다. 촌락의 젊은이들은 이웃으로부터 “자신이 관찰되고 있음”, “집들의 눈”, “이웃의 관심” 자유의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방과 자유”의 상징인 도시로 떠난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 중 하나인 자바시티는 이들에게 전혀 과밀하지 않다. 광활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과밀함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를테면, 산업도시의 비좁은 거주지를 피해 퍼레이트, 박람회, 바자회, 부응회, 스포츠 경기장에서 휴가를 보내는 가족의 선택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투안은 이를 친밀함으로 설명한다. 그들에게 군중 그 자체가 즐거움이며 친밀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 타인의 존재를 참아내는가 또는 즐기는가가 매우 복잡하게 나타남으로 인해 과밀함이나 광활함은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 경기장에서의 타인은 나에게 친밀함과 즐거움을 선사 했다면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로에서는 나에게 공간적 압박을 가한다. 북적대는 방 또는 긴밀한 관계의 소집단 속에서 인간은 따뜻함과 친밀감을 느끼면서도 사생활과 독립공간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이 생긴다.
요약하면, 광활함과 과밀함의 감정에 대한 인간경험을 바탕으로 투안은 '인간의 삶은 장소와 공간 사이의 변증법적 운동'이라고 이야기 한다. 인간은 개방 공간에 있으면 장소를 강렬하게 인식하고, 안전한 장소에 고립되어 있으면 그 너머에 있는 광대한 공간을 동경한다. 보금자리로서 장소를 필요로 하면서도 모험으로서의 공간을 원한다.
책의 후반부에서 투안은 장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장소감 또는 장소에 대한 애착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 책의 의도, <공간과 장소에 관한 인간의 경험, 그 경험의 범위와 복잡성>을 보이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따라서 ‘공간이 인간으로부터 의미를 획득하여 장소가 된다’는 뜻이 ‘공간에 대한 장소의 우위’로 잘못 해석되지 않고 저자의 의도가 성공적으로 달성된다.
<공간과 장소>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 복잡한 감정과 사유를 지닌 존재임을 계속해서 주지시키고 이를 근거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인본주의 지리학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적절하게 전달한다. 이 책을 읽게되는 인간은 그러한 존재적 특성을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독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