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의 <인간과 공간> 서평
<인간과 공간>은 저자 오토볼노가 인간의 본질을 교육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실존철학적 교육학자임을, 그리고 이 책이 그의 주요한 철학서 <새로운 안정>(1955)을 더 발전시키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읽는 것이 적절하다. 그가 <새로운 안정>에서 다루는 주제는 삶에서의 신뢰감, 안정감과 같은 ‘기분’의 문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속적인 세계 등이다. 이 주제들은 <인간과 공간>(1963), <교육적 분위기>(1964)를 통해 철저하게 교육학적인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 인간은 거주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오토볼노는 어떤 논리로 이러한 주장을 펼 수 있는가? 하이데거의 <집짓기, 거주하기, 생각하기>에서 이미 언급된 ‘인간은 거주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볼노 식으로 증명되는가? 이것이 <인간과 공간>에서 흥미롭게 볼만한 점이다.
오토볼노는 책 머리에서, 그동안 주목받아온 시간적 구성틀 대신 공간적 구성틀로 인간 현존재를 분석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지 지켜보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해서 책에서 다루는 연구대상은 바로 공간,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삶이 진행되는 현실의 구체적인 체험공간이 된다. 그는 연구대상을 설정하면서부터 이 연구의 성격이 “체험공간의 중요성과 생산성”을 밝히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체험공간에 대한 논의가 사변적이나 이론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함의를 보일 것임을 미리 밝혀둔 것이다.
우선 볼노는 현대물리학이 규정해 놓은 공간 개념부터 해체했다. 현대물리학적 공간 개념은 균질적이고 무한한 좌표계를 바탕으로 한 수학적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관은 오늘날 부지불식간에 우리 사고 밑바닥에 자리 잡았다. 볼노가 정의하는 공간 특성은 이와는 상반된 것이며, 그가 전개하고자 하는 체험공간의 논의로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볼노에 의하면, 현대식 공간 개념은 콜럼버스와 코페르니쿠스 시대에 이뤄진 공간 의식 혁명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무한하게 넓은 신세계로의 도약, 그리고 지도의 제작과 함께 공간을 균일하게 제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공간은 인간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볼노가 새로 창안한 생각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사람들과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도 그러했다. 볼노가 이 책에서 주로 인용하는 빈스방거, 하이데거, 레빈, 사르트르, 바슐라르, 민코브스키 등은 그 철학자 무리에 속한다.
볼노의 공간 개념으로 볼 때, 좁거나 넓음, 익숙하거나 낯설음,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음과 같은 공간의 성격은 모두 인간 내면의 깊숙한 본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인간은 좁은 공간을 자신을 괴롭히는 압박으로 느끼며, 넓은 공간은 활동 가능한 영역을 의미한다. 익숙한 공간과 대비되는 낯선 공간은 나의 본질과 모순되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먼 곳은 본질상 갈 수 없고-인간이 다가가려 하면 뒤로 달아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동경을 탄생시킨다. 이 모든 공간의 특징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공간 개념에는 공간성 즉, 공간에 대한 관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삶의 공간성 문제는
공간이 어떤 식으로 인간의 본질에 속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렇게 인간이 공간과 관계를 맺는 한, 인간은 공간 내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공간 속의 특정한 위치에 존재한다. 그 위치는 수학적인 좌표계로 설명할 수 있는, 공간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점이 아니라, 특정한 ‘그곳’ 또는 ‘저곳’과 관계하는 여기의 ‘이곳’이다. 이처럼 볼노는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공간성”에 대한 이해 방식을 기본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논의를 이어간다.
지각하고 움직이는 인간 주위로 공간이 구성되듯이, 그 공간은 중심을 이루는 인간의 현 위치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공간의 어디에 어떤 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볼노의 답변을 요약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기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볼노는 이를 “상황적 심정성”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공간에서 버려진 듯이 느낄 수도 있고,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다. 또 공간과 일체감을 느끼기도 하고 공간을 낯설게 여기기도 한다. 인간이 공간과 맺는 관계는 변화하고, 인간이 공간에 존재할 때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처해 있다. 여기서 공간은 일종의 매개체로 존재하며, 인간은 그 안에 처해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볼노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인간이 공간에 처해있고, 공간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무엇인가에 처해있는 상태는 하이데거의 이론에서 언급된, 인간이 세계에 던져진 상태와 반대되는 상태로 설명된다. 던져졌음이란 인간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혹은 그의 의지에 반하여 낯선 매개체 안으로 들어간 상태이다. 말 그대로 우연히 던져진 상태이다. 이때 공간은 인간에게 낯설고 압박하는 매개체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론적 특징을 던져진 상태로 파악한 데 반해, 볼노는 이 상황을 인간 전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볼노가 보기에, 이 상태는 인간의 공간 관계에서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빠져 있을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대인의 특징이다. 중심을 잃어버리고 뿌리가 뽑혀나간 우리 시대의 인간이 공간과 맺고 있는 관계가 “던져짐”의 상태인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누구나 던져진 존재였으나, 볼노에게 던져진 상태는 비정상적이며 극복 대상이 된다. 처해있음의 상태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공간에 처해있는 상태는 던져진 상태보다 인간 발달 단계에서 선행한다는 바슐라르의 말에 볼노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지기 전에 집이라는 품에 에워싸여 따뜻하게 삶을 시작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볼노는 본질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인간이 집 안에서 포근히 둘러싸인 상태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거주’란 낯선 매개체 속의 임의의 자리에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집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머무는 것이다. 결국, 집에 거주하는 것은 던져져 있음과는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상태로, 공간에 처해있는 상태를 뜻하며 볼노는 이 상태가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바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이 거주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말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불행한 삶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던져져 있음이란 상태를자신이 노력하여 거주의 상태로 바꿔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삶이 진행되는 현실의 구체적인 공간, 즉 체험공간의 논의는 ‘거주’의 문제로 수렴되었다. 이제 볼노는 참된 거주를 요구하며 우리의 삶에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첫째는 고향 없이 적대적인 공간에 내던져진 비거주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거주자일 때만 자신의 본질을 실현할 수 있고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일정 장소에 정착하여 안식을 주는 개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동과 변화가 심한 현대인의 생활에서는 새로운 곳에서의 거주의 질서와 집이 주는 안도감을 새로이 확립해야 하는 과제가 더욱 중요해 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노는 바슐라르가 “파리에는 집이 없다”고 말한 대목에 적극 동의를 표했다. 집은 안도감과 안락함을 제공하는, 감성적인 특성과 인간적인 품격을 갖추었을 때 집이 되는 것이지, 대도시 거주자들이 살고 있는 포개진 상자와 같은 집은 추상적이고 수학적 공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볼노가 바슐라르의 말을 빌어 말하고 싶었던 점은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과정에서 체험공간으로서의 집처럼 특정한 공간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지침은 잘못된 거주의 극복이다. 집에만 집착하거나 웅크리고 있는 것은 잘못된 거주이므로 외부 공간도 온전히 삶에 포함하며 내부와 외부 공간의 긴장을 이겨내야 한다. 인간이 공간과의 합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간과 공간의 합일된 상태에 대하여 볼노는 여러 예를 들었는데 이 예시들이 매우 흥미롭다. 대표적인 예가 도보여행이다. 인간은 비좁은 도시와 문명화된 현존재의 조급함에서 나오고 싶은 마음에 도보여행을 한다. 걷는 길은 고향으로 회귀하는 길, 그 자체로 고향이 되는 길이다. 이런 방식의 회귀는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회귀로 이해할 수 있다.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 즉, 자기 소외 이전의 상태, 경직되고 고착되지 않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자동차 도로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자동차 도로에서 단 하나의 의미 있는 행동은 가장 빠른 길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목적지로 가는 것이다. 자동차 운전자는 도보여행자처럼 공간과 합일되지 않고 공간을 스쳐 지나간다.
<인간과 공간>에서 볼노는 개념 간 비교, 구체적인 예시와 묘사를 통해 주장하는 바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낱말의 용례나 언어사적 배경, 관련 저작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다루면서도 답하고자 하는 질문의 핵심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이 인상깊다. 참고한 문헌이 연구범위를 벗어날 때는 현재 논의에 시사하는 바를 제시하며 일축했고, 시인들의 작품을 참고하더라도 시인들이 침묵하고 있는 문제에는 철학자들의 저작으로 보충했다. 이렇게 볼 때, 볼노의 저술 방식은 조선시대 수많은 서적을 남긴 저술가이자 정리의 달인이라고도 불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다산은 “매번 한 글자라도 뜻이 분명치 않은 곳과 만나면 널리 고증하고 자세히 살펴 그 근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뿌리를 캐들어가면서 방증이 될만한 지엽적인 자료들을 수집하여 수렴과 확산의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문제의식이 심화되고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고 믿으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다산과 볼노 모두 교육철학자라는 점도 흥미롭다.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이 인간의 발달과 교육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두 사림이 겹쳐보이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