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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새롬 Jul 06. 2016

#1 200년 간의 '롱디'

인간의 연애사로 본 환경위기

  롱디(long distance, 장거리 연애) 커플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짐'을 실감하곤 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는 말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지만 사람이 변한다. 눈에 들지 않으니 안중(眼中)에도 없다. 원활사랑의 메커니즘은 지각할 수 있을 때 유효하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일지 모른다. 인간과 '자연'의 연애사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근대 이후 우리는 기계제 대규모 생산방식과 분업 및 전문화가 일반적인 사회에 살게 되었다. 인간의 연애사에서 '자연'과의 '롱디'가 시작되는 시점이니 유심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기계제 대규모 생산방식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경제적 잉여를 위해 '자연'과의 관계가 냉락해지는 길을 택하게 된다. '화폐'를 위한 생산. 더 이상 자연과 인간은 직접적 필요로 엮이지 않았다.


  [연애에서 생활세계란]

  인간은 필요를 초과하는 잉여를 생산했고 그 잉여가 산업화와 자본의 축적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인간이 생사를 걸고 필요로 해왔던 '자연' 인간의 생활세계에서 철저하게 분리되었다. 이때 생활세계란 앙드레 고르스(Andre Gorz)의 말을 빌리면, 개인이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보고,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세계다. 나의 생활세계 어디에도 '그'가 없는, 이 연애는 지속될 수 있을까? 보사드(J.H.Bossard)의 법칙을 기억하자. 큐피드의 화살은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철벽인(人)]

  상황이 악화된 것은 이 와 인간이 '철벽'을 치기 시한 것이. 기계제 대규모 생산방식이 더 많은 자본 축적을 위해 "제대로" 운용되려면,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인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부분적이고 특수한 지식을 보유하려 '철벽'을 견고히 구축하였으나, 동시에 자기 생활세계의 무엇도 직관할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직관할 필요성도 잊었다.


  전차를 타는 우리는 전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전차의 작동을 신뢰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이 신뢰에 기초하여 행동합니다. 
             - 막스 베버(Max Weber)


  그러니까 인간 개개인이 자연과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해도 이 세계는 굴러간다. 굴러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연애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라면 이것이 아닐까. 환경위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년에 걸친 사연]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여전히 조망하지 못한 채, 환경위기를 기술로 극복하겠다며 전문성으로 무장하고 '철벽'을 더욱 두텁고 견고히 했다. 그러나 이는 환경위기에 대한 무감각과 기술만능주의를 양산할 뿐이었다. 진정 인류 연애사에서 '롱디'의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 걸까? 연애상담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롱디 커플 모임 인터넷 카페에 사연이라도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롱디' 200년 정도 된 커플입니다.
이제는 관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힘들어요. 극복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거든요. 서로 지친 것 같아요.


참고문헌: 앙드레고르스「에콜로지카」,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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