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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꾹이누나 Jul 23. 2023

한 번쯤은, 대마도

부산에서 배 타고 떠난 엉망진창 #대마도여행기

어떤 여행은 매우 충동적이다. 잘 짜인 여행에서 오는 안정과 만족감이 있다면, 얼기설기 대충 짜인 여행에서도 오는 매력이 있는 법이다. 주로 여행을 매우 촘촘하게 준비하는 스타일이고 특히 상대방이 '극 P'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한데, '당일치기'라는 말 한마디에 게으름이 더해져 그만 준비성이 무장해제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아무 준비 없이 떠난 시트콤 같았던 20년 지기 친구와의 대마도 당일치기에 대한 기록이다.


른바, 엉망진창 대마도 당일 여행기!

(주의, 절대 따라 하지 마세요~!!)



1.
시작은 이러했다.

이미 5월쯤 긴 휴가를 다녀온 터라 여름휴가는 당연히 없을 거라고 단념하던 찰나에 지인이 대마도 왕복 배편이 무려 35,000원에 특가로 나왔다며 귀띔해 주었다. 사실 말이 좋아 당일치기지, 무려 해외여행을 당일로 다녀오는 셈 아닌가? 부산은 일본이랑 무척 가까우니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기에 여기 있을 때(+마침 엔화가 저렴할 때) 기회 되면 일본 여행 다녀오라는 주변에 말에 그만 용기를 얻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해외라서 혼자라면 망설였을 텐데, 또 마침 20년 지기 고향친구가 마침 부산여행을 온다고 하니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딱 맞아떨어졌다.


일단은 친구의 일정에 맞추어 배편을 예약하고 인터넷 후기를 좀 뒤적거리니 주로 반응이 비슷했다.

- 크게 볼 건 없어요

- 산토리 위스키나 아사히 생맥주캔 좀 사 오면 됩니다

- 해외는 해외니깐 시내면세점 꼭 이용하시고요


???

이때부터 여행에 대한 기대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면세에서 살 것도 없고 최근 들어 물욕도 사라져 필요한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는데 수많은 대마도 후기 대부분은 '대마도에서 꼭 살 것', '대마도 마트 털기'정도뿐이었다. 기대가 사라지니 야무지게 여행을 준비할 의욕도 사라져 친구에게 마음 가볍게 마실처럼 다녀오자고 하니 친구도 'ㅇㅇ'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딱 하나, 네이버에서 정성스레 검색해 친구 카톡에 보내두었다. "니혼고가 데끼마셍"(일본어를 못합니다!)




2.
당일 부산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한산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여객터미널은 발 디딜 틈이 없이 북적였다. 다들 캐리어를 끌고 한껏 들뜬 표정이었는데, 나는 휴대폰만 겨우 들어가는 작은 가방에 여권과 혹시 몰라 챙겨 온 장바구니만 달랑 담아왔다. 멀미도 잘 안 하면서 또 대마도 갈 때는 멀미를 조심하라는 주변의 고견을 받들어 멀미약 야무지게 챙겨 먹고 배에 올라, 눈 뜨니 대마도였다..(자느라 멀미 1도 없었음)


그래도 평생에 '극 J'로 살아온 덕에, 남들 다 가는 코스 따라 머릿속에 대충 담아 온 계획을 친구에게 전했다.

- 일단 1시간 10분이면 대마도 히타카츠항에 도착한대. 그럼 근처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자전거를 1900엔에 빌릴 수 있고, 그 근처에 꽤 맛있다는 '스시 도로코 신이치'에서 점심을 먹어. 생맥주 아니 나마비루 꼭 먹어. 그렇게 자전거 타고 조금 가면 미우다 해변 나와. 가서 물에 발좀 담그고 우리도 산토리 위스키 사보자. 콜?

- 응, 뭔지 모르겠지만 콜!




3.

대마도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시골마을의 고즈넉한 정취가 물씬 느껴졌다. 다년간의 여행 짬빠로 사람들이 많이 가는 식당이라면 무조건 먼저 웨이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친구에게 먼저 자전거를 빌리고 있으라 하고 길 건너 식당으로 돌격해 입장 2번째 순서표를 뿌듯하게 쟁취했다. 오케이, 여행이 꽤 잘 풀리는 것만 같아 길 건너 게스트하우스에서 자전거를 빌리는 친구에게로 향했다.


제법 일본의 정취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달까


비극은 여기서부터. 일단 대마도가 워낙 시골이라 거의 카드가 안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것도 모르고 해외여행에 유용한 체크카드에 현금을 담아왔는데 현금만 받는단다. 겨우 계좌이체로 결제를 해결하니 다음은 친구였다. 자전거를 못 탄단다. 보조바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단다. 아니, 분명 10여 년 전 친구와 갔던 제주도 여행에서 우도 한 바퀴를 자전거로 돌았던 기억이 선명한데! 친구가 그때 본인은 다른 친구랑 2인용 자전거를 탔단다.(앗차)


그럼 식당 오픈 전까지 1시간 남았으니 자전거를 배워보자!

할아버지가 손녀 자전거 가르쳐주는 사진같이 평화롭게 보이지만 우리는 전쟁중이었다(크흡)

... 대 실패.

오만함을 반성했다. 한 시간이면 친구가 자전거를 잘 탈 수 있도록 자전거의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전거를 대여해 주던 할아버지까지 나와서 셋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전거를 잡아주고 설명해 주고 안 무섭다 괜찮다 반복했지만 친구가 안될 것 같다고 했다. 5시간까지 넉넉하게 탈 수 있게 인당 1900엔에 자전거를 대여했느냐, 한 시간 연습 끝에 자전거를 반납했다. 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로 자전거를 잡아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환불은 괜찮다며 식당으로 향했다. 스미마셍 스미마셍.




4.

식당 앞에는 오버 조금 보태서 같은 배를 타고 온 한국인이 거의 다 모여있었다. 모두 땡볕에서 기다리는 와중에  일전에 서두른 덕에 오픈하자마자 시원한 에어컨바람으로 개선장군 마냥 입장했다.


그 고생끝에 마신 나마비루 첫 입은 정말 잊을 수 없다ㅠㅠ


안 되는 일본어지만 온갖 영화와 일식집에서 들어본 일본어를 다 갖다 붙였다.

나마비루데쓰! 오이시! 아부리데쓰? 오 하잇! (또) 오이시! 아리가또! (다 나왔나 싶어서) 시마이데쓰? (마지막으로 외워둔) 니혼고 데끼마셍!

친구가 도대체 일본어도 못하면서도 어떻게 다 알아듣는 거냐면서 놀람 반 놀림 반으로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모르겠지만 대충 찍고 있다고 대답하며, 일본어 1도 못하면서도 유일하게 식당에서 식당아저씨와 대화하면서 맛있다고 스시를 몇 점 주워 먹으니 자전거 실패의 악몽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며 다시 길을 나섰다.


날씨는 쾌청


5.

가게 밖으로 나오니 30도가 훌쩍 넘었. 애초에 자전거 외에 차선책은 생각조차 안 했기에 대중교통도 모르고 국제면허증조차 안 가져와서 렌트도 불가한 상황. 선택은 도보이동뿐이었기에 이참에 살이나 뺀다며 걷기 시작한 지 5분 만에 대화를 잃었다(ㅋㅋ)


조금 걷다 보니 아까 같은 골목에서 자전거를 배우던 커플이 이미 미우다 해변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 헐 결국 자전거 타셨네요?

- 헐 결국 안되셨어요?

- 얼마나 걸려요?

- 걸어가면 꽤 걸릴 수도 있어요ㅠㅠ

그래도 해외여행에서 만나는 우리 동포가 최고인 게, 땡볕에 걷고 있으니 자판기에 이 음료가 맛있으니 꼭 마셔보라길래, 저희는 현금이 없어요 하니 동전을 빌려주었다. 돌아가는 배편에 현금을 드리겠다며 감사인사를 나누고 겨우 갈증을 해결하며 그렇게 30분가량을 걸었다.


아무도 걷지 않는 시골 도로. 그때부터는 정신이 살짝 풀리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말도 없이 터덜터덜 걷기를 한참, 터널 지나면 오른쪽에 바로 해변이 나온다던 커플의 말대로 진짜 거짓말처럼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헐 바다다!! 바다다!! 바다가 보인다!!!!
미우다 해변




6.

부산에서 고작 한시건 조금 넘게 떨어진 바다인데 미우대해변의 색깔은 부산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사람들이 대마도에 물놀이만 하러 오기도 한다더니, 가히 물이 무척이나 맑고 청량했다. 작은 해변을 찾는 사람 대부분이 부산에서 출발한 한국인인지 해변에 딱 하나 있는 푸드트럭에는 한국어로 메뉴가 적혀있었다. 아는 게 나마비루라 또 나마비루에 타코야키를 주문하니 현금만 된단다. 앗, 스미마셍- 하니 한국돈도 된단다. 엔화 떡락의 시대에 1:1의 환율로 타코야키랑 생맥주를 사들고 해변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타이밍은 좋아 단체관광객이 쏟아지기 전 한적한 해변가에 앉아 한참 물멍을 때렸다.


대마도 와서 맥주만 3잔째ㅋㅋㅋㅋㅋㅋㅋ


돌아가는 시간까지는 고작 2시간 남짓 남았을 때, 단호하게 산토리 위스키를 사러 마트행을 선택했다. 대마도에는 밸류마트라는 식료품점이 여러 지점 있는데, 그나마 가깝고 비교적 큰 편인 밸류마트 오우라점으로 향했다. 마침 누군가 내렸던 택시를 바로 잡아 밸류마트 오우라를 외치니 고개를 끄적이시는 택시 아저씨. 하지만  택시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7.

일본이 아무리 아날로그 절정이라지만...

이제는 길에서 손 흔들러 택시도 잘 안 잡게 되는 카카오택시의 나라에서 온 우리는 가까운 대마도의 택시가 현금밖에 안 받는지를 꿈에도 몰랐다(아니 안 찾아본 것이다ㅠㅠ). 현금이 없다 하니 큐알코드를 찍어 결제하는 'Paypay'로 결제를 하라는데 난생처음 보는 페이페이 큐알은 온통 일본어요, 그마저도 해당 국가에서 사용할 수 없다나 어쩐다나 사용이 불가했다. 별 수 없이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조또 마떼 구다사이- 를 외치고 한국인 아무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 건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아무도 모르는 일본땅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두어 사람에게 구걸하듯 물어보니 마트 앞 의자에 앉아계시던 어머니 두 분이 손짓으로 우리를 불렀다.

- (말없이 지갑을 꺼내시며) 얼마?

- 아... 3000천 엔이요ㅠㅠ 정말 감사합니다.

- 계좌는 여기로.


그렇게 쏘쿨하게 3000엔을 빌려주신 어머니 덕에 2000엔 택시비(이쯤 되니 렌트보다 돈을 더 쓴 것만 같았지만 생각하기도 싫다)를 겨우 지불하고 마트로 들어갔다. 진이 빠져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로 마트에 한동안 우두커니 있다가 한참뒤에 정신줄을 겨우 붙잡았다. 이쯤 되면 놀랍지도 않게 산토리 위스키 품절! 나머지는 뭘 사보려고 해도 까막눈이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채로 걷다가 문득 간장이 보였다. 장 보는 일본인 아줌마에게, 스미마셍 사시미 소이소스 오이시?(갸우뚱갸우뚱을 곁들여) 하니 오! 하고 간장 하나 추천해 주셨다. 이쯤 되니 너는 정말 대단하다며 고개를 내젓는 친구 역시 주변 한국인이 주워 담는 과자 두어 개, 컵라면 한 개, 그리고 한국의 편의점에서도 파는(ㅋㅋ) 아사히 생맥주캔을 구매했다.


항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더 수월했다. 캐리어에 바리바리 장을 봐가시는 한국인 아줌마 가방을 택시에 넣어드리면서 카풀을 여쭤보니 같이 가자고 하셨다. 처음에는 왜 때문인지 4명은 탑승 불가라던 택시아저씨도 K-아줌마의 포스에 눌려 탑승을 허가했고, 그렇게 1400엔으로 히타카츠항에 돌아올 수 있었다(우리는 남은 1000엔 현금을 아주머니들에게 드렸다!)




8.

탑승수속까지 40분가량이 남아서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가기 전에 골목이라도 한번 더 돌아보자며 나오자마자 아이스크림이 손을 타고 뚝뚝 흐르기 시작해서 가게로 다시 들어왔다(ㅋㅋㅋ) 놀랍지도 않은 상황에 가게 주인만 화들짝 놀라 물티슈를 건네줄 뿐이었다. 다이죠부 다이죠부.


아이스크림도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깜빡할 뻔했다며 부지런히 멀미약을 챙겨 먹고 아침에 타고 온 팬스타 호에 오르니 그야말로 실신해서 눈 떠보니 부산이었다...




9.

극강의 'P'인 친구가 말했다.

- 네가 J라서 그런가 본데 내 여행은 원래 이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런 게 또 여행의 묘미 아니겠어

- 근데 마 자전거는 쫌 배워라ㅋㅋㅋㅋ


그날밤 우리는 당초 광안리에 가서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지만 너무 지쳐 동네에서 회 한 사바리를 사 와 집에서 먹었다. 마침 일본 아주머니가 추천해 준 회간장이 생각이나 회를 찍어먹었는데 오? 오이시! 달짝지근 하니 무척이나 맛있었다. 그렇게 회간장만 남은 대마도 당일치기였다고 한다.


당신이 혹시 대마도를 가게 되거든 환전만큼은 꼭 하길 바라며, 니혼고가 끼마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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