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여태 만들었던 책 중에 뭐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라는 애매모호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흠, 다 기억에 남는데. 뭘 말하지? 이건 작가(저자)가 이상해서 기억에 남고, 저건 사수한테 욕 먹으며 만든 거라 기억에 남고, 또 그건 작가(저자) 대신 집필하다시피 해서 기억에 남고, 또 요건 지독하게 안 나가서 기억에 남는데 말이지..... 이런 생각들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그래, 이제부터 이걸 얘기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일단 책을 만드는 동안 가장 많이 배웠고(나의 무식을 통감했다), 많이 감탄했고(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지), 몹시 질투가 났으며(우리나라엔 이런 크로스오버 저술가가 왜 없지), 만들고 난 다음 아주 뿌듯했기(흠, 찾아보기 하는 데만 일주일 걸렸어, 다른 건 말 안 해도...하면서) 때문이다. 바로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사가인 피터 왓슨 할배가 쓴 벽돌책, 우리나라에 소개된 벽돌책의 기원이 되다시피한, <생각의 역사>이다.
피터 왓슨은 원래 2000년에 <생각의 역사II-20세기 지성사(원제: Terrible Beauty>를 발표하고, 5년 뒤인 2005년에 <생각의 역사1-불에서 프로이트까지(원제: Ideas)>를 내놓았다. 그러나 국내판은 저작의 내용에 따라 ‘불에서 프로이트까지’를 다룬 <생각의 역사1>을 먼저 출간하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부터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까지’를 다룬 <생각의 역사II>를 뒤이어 출간했다. <생각의 역사>는 “흥미진진한 사상의 파노라마이자 지성의 향연”이자 문자 그대로 “저자의 향기가 투영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 할 만하다. 저널리스트인 피터 왓슨은 이 타이틀을 발표함으로써 일약 스타 문화사가의 반열에 올랐다. 광범위한 인류 지성사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도 결코 균형을 잃거나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았다는 점, 7000매가 넘는 방대한 양을 저술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 특유의 시각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와 더불어 학문적 크로스오버의 수위를 높인 것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책을 만든 것이 꽤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내가 쓴 보도자료에 의하면 1권은 "플라톤적 관심을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이해'한 것으로 "영혼.유럽.실험의 세 가지 관념으로 인류 지성사를 쾌도난마"한 것이다. "생각과 실험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진보되었다"고 보는 것인데, 한마디로 “플라톤적 관심에서 출발한 서양의 지적 전통을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2권은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쓴 포괄적이고 독특한 역사서'로서 '정치적 팩트에 얽매인 기존 역사서의 시각을 거부한 저작'이다. 여기서는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대중화, 삶의 ‘도약’을 종횡무진 보여주면서 앞으로 인류의 미래는 "탈서구적 사유와 포스트사이언스적 사고의 시대를 기약"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 타이틀에 대한 나의 사적인 기억은 두 분 역자 선생님에게로 오롯이 향한다. 두 분 다 걸출한 번역자였고, 보기 드문 언어천재였으며, 걸어다니는 지식자판기이기도 했다. 너무도 안타깝게 작고하신 남경태 선생님은 한동안 우리 회사 작가방에 머물면서 같이 탁구를 치고, 밥을 먹고, 즐거운 '수다'에 동참하곤 하셨다. 당시 함께 일하던 편집자들에게 "저 처자는 출판사에서 근무하기 아까운 사람이야" 하면서 행복한 칭찬을 마구 날려주던, 세상 다정한 분이었다. 또 한 분의 위대한 번역자 이광일 선생님은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막걸리를 와인 잔에 즐기던 멋진 양반이었다. 그분 덕에 나는 괴짜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굴다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글을 적고 있자니 두 분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듯하다.
"아이 참, 밥 먹고 해"
"와인할래요, 막걸리 할래요"
나는 책 만드는 일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가장 동물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본다. 내게 저자(작가)는 원초적인 애정과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냥 사랑이 먼저다. 날 선 분석과 적확한 비판은 언제나 그다음이다. 그러다 보니 (기대 이상으로) 오래 함께하는 저자 샘들을 멘토로서, 친구로서 얻게 되었고, 이제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 그래서 내게 책은, 어느 것이든, 다 사랑이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따스한, 잉크 냄새 폴폴 올라오는 신상이다. 요즘도 이따금 나는 그 책들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유난히 적막한 사무실에 앉아 교정지 속에 빠져 있는 거북목을 떠올린다.
*<이상한 나라의 할머니_별걸 다 편집하다가 늙었습니다>는 박홍규 교수님의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의 오마주이기도 한, 나의 편집자로서의 편집 연대기이자 좋든 싫든 억지로든 내가 만든 인상 깊은 책에 대한 사적인 기록이다(기억이 온전하지 않아서 당시 내가 썼던 보도자료를 많이 참고해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