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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기 Oct 21. 2023

당신의 인간관계 윈도우 포맷하실게요

최진영의 소설 창


최진영의 소설 창

당신의 인간관계 윈도우 포맷하실게요


최진영의 소설 '창'은 조직사회의 집단 따돌림, 왕따 문제와 편을 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다루는 이야기다.  '창'은 기발하고 극단적인 상상력이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독자를 매료시키는 소설이다. 최진영은 소설 속 주인공의 고통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집단 속 개인의 아픔에 대한 간접 경험의 극대화를 통해 경청과 공감을 유도한다.


아무도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업어주지 않을 것이다. 서로 눈치나 보면서 모르는 척하겠지. 쇼하는 거라고 코웃음이나 치겠지. 그러다가 내가 끝내 일어나지 않으면, 치우긴 치워야 할 테니까 119 정도는 부를지도 몰라. 저거 무슨 전염병 걸린 거 아냐? 신종플루 같은 거 묻히고 들어온 거 아냐? 그런 말들이나 하면서. 과장이 심하다고? 피해의식이라고?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고?
그래, 나도 이게 그저 과대망상에 피해의식이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소설 본문 중에서)


소설 속 주인공은 전형적인 흙수저 인생으로 외모도 뛰어나지 않고 스펙도 변변하게 내세울 게 없는 88만 원 MZ세대로 묘사된다. 들어가는 회사마다 인싸가 되지 못하고 아싸로 겉돌며 직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비정규직 회사원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두 번이나 단기 퇴사 후 세 번째 직장에서는 2년은 버텨야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죽자고 버티어보지만 조직은 그녀에게 이래도 안 나가고 버틸래 하며 마지막 막다른 골목으로 상황을 몰고 간다. 


언제나 그들과 같은 식당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전에 한번, 그들이 먼저 들어간 식당에 멋모르고 뒤늦게 들어가 같이 점심을 먹어야 하는 참담한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밥을 먹는 내내 정말이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서 나는 굉장히 급하게 밥을 먹었고, 덕분에 종일 화장실에 들락거리느라 실장에 괜한 욕을 들어야 했다.
(소설 본문 중에서)


학벌도 배경도 없는 주제에 눈치까지 없는 주인공은 동료들의 무시와 소외 속에서 상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신세이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하루종일 놀고먹는 대부분의 직원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일을 안 하면 돈도 배경도 없는 게 일도 안 하고 조직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일을 적당히 하면 젊은 게 열정도 패기도 없이 세상을 기회주의적으로 산다는 이유로 결국에는 왕따를 당하고 만다.


그날부터 나는 벌레가 됐다. 다른 이유는 없다. 세련되지 못해서다. 남들은 세련되게 이기적인데, 나는 눈치도 없고 촌스럽다. 그렇다고 계속 상처만 받고 있을 수도 없다. 그들이 나를 무시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이 나를 어떤 반찬으로 만들어 씹어 먹고 있을지...... 궁금하지도 않다. 비겁하고 옹졸한 사람들이다. 오죽할 일이 없고 심심하면 나 같은 애를 따돌리고 욕하면서 뿌듯해하고 즐거워하겠나. 그들은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든 뒤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내가 쟤보다는 낫잖아'같은 유치한 심사로.
(소설 본문 중에서)


조직으로부터 벌레 같은 취급을 당하지만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키고 싶은 주인공. 하지만 동료의 피시에서 다른 직원과의 대화내용을 훔쳐보게 된 그녀. 온통 자신에 대한 비난과 욕으로 도배된 화면을 보고 동료의 컴퓨터를 포맷하고 모든 파일을 지우는 모험을 한다. 그리고 회사의 모든 컴퓨터를 포맷하고 집으로 가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통쾌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다음 폭탄 돌리기의 순번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최진영 소설가는 2006년 실천문학을 통해 데뷔 후 '구의 증명'을 통해 소설마니아들에게 이름이 각인되었다. 한겨레문학상(당신 옆을 스쳐 간 그녀의 이름은), 신동엽문학상(팽이), 만해문학상(이제야 언니에게), 이상문학상(홈 스위트 홈) 등을 차례로 섭렵하며 문단의 주류 및 중견작가로 성장하였다. 


문장의 소리 팟캐스트를 통하여 라디오 진행자로서도 안정적인 진행으로 재능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소설을 발표하고 작품으로 대중과 소통할 때 가장 멋져 보이는 진정한 프로소설가로 성장하였다. 전성기에 도달한 소설가의 필력은 세상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작가가 어려운 과정에서도 소설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세상을 향해 열정이 담긴 작품을 내보일 수 있게 독자들과 한국문단이 든든하게 뒷받침을 해주어야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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