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면서 야금야금 읽고 있는 책이에요. 이성복의 '무한화서'입니다. 천천히 눈으로 읽어가고 있고, 뒤따라서 천천히 필사하면서 다시 읽고 쓰고 있어요.
<저자 소개>
이성복 : 1952년 경북 상주 출생,서울대학교 불문과와 동 대학원.
1977년 계간 '문학과 지성' 통해등단
1992`2012 계명대 불문과와 문예 창작 강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
시집 필사 출간 모임을 운영하다 보니 더 마음에 와닿고 더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있으니 눈도 귀와 오감을 열고 살펴보게 되네요.
12월은 쉬고 2025년 1월 2일부터 다시 시집 필사 출간 모임 11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니 시에 관한 책이니 눈과 귀가 쫑끗할 수밖에요. 매달 새로운 시에 관한 책을 줌 나눔 할 때 소개하곤 했어요.
시를 쓰면서 필사 시가 중요하죠. 또 이론적인 내용도 중요하기에 필사 시집과 이론에 관한 책 한 권을 한 달 내내 조금씩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총 183p이지만 78p까지 읽은 내용을 소개합니다. 한꺼번에 읽을 책도 아니고 조금씩 읽으면서 되새기면서 읽거나 글을 쓸 때마다 참고하면 좋을 내용이죠.
78p까지 총 196가지를 아포리즘 형식으로 각각 3~5문장으로 쓰여 있어요.
짧은 문장들이지만 글을 쓰시는 분들이라면 깨달음과 탄식이 이어지는 글이 많아요.
책리뷰는 인상적인 문장 3군데를 꼽는데요. 이 책은 5군데 정도를 뽑아야겠어요.
0. '화서 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말해요. 순우리말로 '꽃차례'라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고 (원심성),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이에요(구심성). 구체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무한화서 11p
0번의 글에서부터 멈췄어요. 새로운 무한화서라는 어휘를 알게 되는 시점이죠.
거기다가 시가 무한화서처럼 성장에 제한이 없다는 글은 다른 나라를 여행했을 때, 와~ 이런 세상도 있네 했던 경이로움을 느꼈던 것처럼 시란 세상이 넓구나 하고 감탄과 함께 좁았던 시야에서 광활한 초원과 우주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무한화서'라는 말부터가 낯설지만 꽃이 피는 순서가 아래에서 위로 한없이 펼쳐질 수 있어서 무한화서라고 합니다. 이 어휘를 배운 것만으로도 큰 소득입니다.
꽃 피는 순서와 모양도 꽃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찾아보고 배우게 되었어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 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은유와 비유를 통해서 시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라고 했는데요. 이 말에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표현하고 성공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실패하면서 과정을 통해 나아간다는 의미니까요.
6. 체험이 풍부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에요. 그건 시가 쓰는 사람 내부에 있다는 오해에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고 시가 대상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대나무의 본질을 알려다가 마음 병만 얻었다는 격물치지의 일화도 있잖아요. 결국 시는 언어에 있는 게 아닐까 해요. 현실의 온갖 오물들이 다 묻어 있는 언어는 그 때문에 축복받았다 할 수 있어요. 시인과 대상은 언어가 시라는 날개를 얻기까지 거치는 숙주인지도 몰라요.
무한화서 13P
체험이 많으면 좋을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완전 부정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내부도, 외부도 아닌 언어에 있다고 뜻이겠지요. 언어를 만나서 시라는 날개를 얻는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니 다양한 언어 표현을 읽고 듣고 쓰고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체험과 외부(대상)와 시인과 언어가 만났을 때시를 만나게 됩니다. 시인, 대상, 언어 세 단어가 크게 다가옵니다.
31. 시의 첫 구절은 작살 총의 방아쇠 구실을 해요. 다음 구절은 저절로 따라나오게 돼 있어요. 말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말이 하는 소리를 내가 듣는 거예요. 말은 짐승들처럼 입과 꼬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앞 문장을 뒤 문장이 물고 따라올 수 있는 거지요.
무한화서 22P
시 강좌를 수강하다 보면 첫 구절을 담담하게 생각나는 대로 툭 던지라고 하더군요. 잘 써야지 하는 생각보다 그저 떠오른 느낌을 던지고 쓰다 보면 다음 말들이 이어진다고요.
이 말대로 했더니 첫 문장에 대한 부담이 훨씬 줄었거든요. 이성복 작가 말처럼 첫 구절이 방아쇠 역할을 해요. 저절로 따라오기도 하고, 한참 머뭇거리기도 하고. 나중에 쓰기도 해요.
첫 문장을 쓰기 힘들다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잘 쓰려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이 간혹 있는데요.
툭 던지고 그냥 써보는 거예요. 어떤 때는 줄줄이 써 내려갈 때도 있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반복할 때도 있죠.
꿈
김민들레
제가 어떻게 10km로 달려요?
5km만 달려도 성공이에요.
제가 어떻게 하프를 달려요?
못할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풀코스를 달려요?
못 해요, 못 해.
제가 풀코스를 완주했어요.
꿈꾸니까 되네요.
당신의 꿈은 뭔가요?
-마라톤, 시처럼 아름답게 29p-
마라톤 시집을 쓸 때 주변에서 많이 하는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10km 달려요? 저도 처음에 이렇게 말했거든요.
잘 쓰려고 하기보다 생각나는 대로 습작한다고 생각하고 써 내려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머뭇거리다가, 더 좋은 말이 생각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몇 년째 쓰지 못하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42. 입말에 가깝게 쓰세요. 그래야 자연스럽고 리듬과 어조가 살아나요. 첫 구절만 봐도, 머리로 썼는지, 입으로 썼는지 알 수 있어요. 입술로 중얼거리고 혀로 더듬거려 보세요. 내용은 하나도 안 중요해요. 아니, 그렇게 해야 내용도 살아나게 돼요.
-무한화서 25P
이 책에서 시를 소개하진 않아요. 필사한 시 중에서 입말이라고 생각한 시입니다.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45. 시 쓰기를 겁내지 마세요. 자기 자신에게, 옆 사람에게 속삭이듯 얘기하면 돼요. 다만, 말은 말이 반이고 침묵이 반이라는 것, 그리고 어떤 얘기를 하려면 다른 얘기를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
무한화서 26p
시 쓰기를 겁내지 말라고 하는데요, 저도 시집 필사 출간 모임 하면서 시 쓰기를 주저하는 분이 많으세요.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건데 그러다가 영영 못쓰게 되거든요. 일단 한 발자국 용기 내는 게 가장 중요한데 가장 어려워하십니다.
인용 문장 중, 다만 그다음 문장이 아주 매섭게 들려요. 말 반, 침묵 반으로 쓰라고 하는군요. 얘기를 하려면 다른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하고요.
어떤 시가 있나 찾아봤어요.
내 맘대로
김민들레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될지니
꾸준히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을지니
그러려니 해라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김민들레 '시란 것이
그저 쓸 때 좋으면 그만이여 95p-
누구는 세상을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꼭 노력만큼 성과가 오진 않더라고요. 또 반대로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죠. 세상은 노력해서 되는 것도 많고, 노력해도 되지 않은 일도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무한화서'를 반 정도 읽고 나서 쓴 후기입니다. 시집 필사 출간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보니 한 문장 한 문장이 쏙쏙 박힙니다. 그렇다고 다 이해되진 않아요.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할 책으로 생각하고 읽고, 필사하고 있어요.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고 싶은 분이라면 필독서가 아닐까 합니다.
*2025년 1월 2일 시집 필사 출간 모임 11기 시작합니다. 알림 원하시는 분 댓글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