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수학과 대학원 일기
교수님께서 박사과정 유학을 진지하게 권하셨다.
말씀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영어로 소통하는 것에 있어 불편함이 없고, 일련의 여러 사건으로 인해 내가 전체적으로 주눅이 들어 있어, 그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는 아예 새로운 환경에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나도 정말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지금 재학 중인 학교에 석사과정으로 지원한 것도, 사실은 박사과정은 유학을 가고 싶어서였다.
탑스쿨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미국 박사학위라는 타이틀이 가지는 힘은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연히 학교보다는 분야, 분야보다는 실적이 중요시되는 게 맞지만 세상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는 것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혹은 옳지 않은가의 여부를 떠나서 그것은 사실이다.
유학을 가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듯이, 교수님께서는 몇몇 학교를 구체적으로 제안하셨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곳 모두 내게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곳들이었다.
사실 꺼려지는 것이 없다.
딱히 사치하는 편도 아니라 학교 측에서 제안해 주는 돈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
여기에 친구도 그렇게 많지 않고
독일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을 때도 혼자 요리해 먹으면서 살았다.
인종차별 또한 직접적으로 칼이나 총으로 위해를 가하는 것은 무섭지만
그 외의 것들은 사실, 별로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주저하는 유일한 이유는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사실 교제를 안 해본 것은 아니나, 이렇게 생각한 적은 처음이다.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목표와 집념은 사회적 성공에 닿아 있었다.
나의 행복도 어쩌면 그곳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연구가 어떤 중요한 마일스톤이 되어서 저명한 인사가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 논문의 인용수가 높아지며 (...)
이곳저곳에 초청받아 다니면서 내 결과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요즘은 이러한 사회적 성공이 행복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이것이 일시적인 것인지, 허상인지, 아니면 옳은 것인지는 전부 모르겠다.
행복을 누군가에게 '위탁' 한다는 개념이 위험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 누군가가 떠나면 행복도 사라지므로) 더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다.
나는 울어도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호텔 야경을 내려다보며 내가 내일 발표할 탑 저널에 실린 내 논문을 찢으면서 울고 싶다.
나는 괴로워도 비행기 1등석 창문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괴롭고 싶다.
어차피 계속 인생이 울고 불고 괴로울 거라면 그런 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요새는 자꾸 내가 울고 불고 괴롭지 않을 거라는 착각이 계속 든다.
그리고 내가 사실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거라면 앞서 이야기한 사회적 성공 또한 그리 중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학을 가는 것이 도전이고, 도반이라 생각하겠지만
지금 나의 경우에는 완전히 반대인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가치를 따라갈지
혹은 새로 생겨난 가치에 판돈을 걸어볼지, 그것을 말이다.
사람 사이 관계가 연구나 공부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다.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연구나 공부는 다가온다.
(물론 마음이 조급하면 연구나 공부 또한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내가 성큼 다가가면 훅 물러날 수도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굉장한 불확실성을 가진, 심지어는 그것이 다소 불합리하게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살면서 해 온 나의 여러 가지 선택은
도전이자 도반이자 도박이었고
항상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많은 자연 현상도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원자 모형에서 전자 또한 궤도가 아닌 확률적 분포로 존재하고
뉴턴 3법칙과 유클리드 공준은 옳다고 말할 수 없을 수도 있고
달이 그곳에 있는지 아닌지도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모든 문제들에서 조금 떨어지려고 한다.
교수님께서 유학을 제안하시고, 그래서 재입학 문제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보니 오히려 무언가 맑아져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정까지는 다소 조급하고 촉박한 마음이 있었는데, 내가 조급하고 촉박하다고 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물리적으로 길어지거나 짧아지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그런 마음을 걷어내니 남은 시간들이 더 명확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한 발자국 멀어지려고 한다. 그로 인해서 제대로 보고 싶다. 사람에게 일부분 행복을 걸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줄지, 그리고 그것이 상실되어도 얼마나 괜찮을지 명확히 보고 싶다.
이로 인해 남는 에너지는 연구에 다소 집중하고 싶다. 집중한다는 것이 연구에 성큼 다가가겠다는 뜻은 아니고, 연구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맴돌고 싶다. 그로 인해서 정말 과정을 즐기고 싶다.
사실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5개 정도 있다. (코스웍과 조교 수업 빼고 석사 논문도 빼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공동 연구 중인 부분도 있고, 지도교수님과 혹은 다른 교수님과 연구 중인 것들도 있다.
여러 문제들에 조금씩 떨어지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불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