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Dear Poet X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
11:00 A.M.
기상했다.
해야 할 일들이 어렵게만 느껴져 막막했다.
2:00 P.M.
한 줄 짜리 시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끝나는 폭죽을 샀다.’
제목 - 스무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카톡 프로필 글귀로 해 두었다.
3:00 P.M.
역시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나니 조금씩 힘이 났다.
나도 좋은 걸 만들어 내겠다는,
그런 열정이 생겼다.
7:30 P.M.
시 낭독 행사에 촬영을 하러 갔다.
오늘따라 시인들 라인업이 많아,
무슨 시 페스티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등장했다.
올해 김수영문학상의 수상자라고 했다.
그제서야 오늘이 시상식이라는 걸 알았다.
시상식 사진들 보면,
대박 지루해보이는 데서 하길래
설마 위트 앤 시니컬에서 할 줄은 몰랐지요~
시상이 끝나자 축사가 이어졌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축사 때문이다.
축사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문보영 시인이 본인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자 시키면 딸려 나오는 피클 용기'
결국 국물을 쏟아내 휴지를 찾게 하는 피클처럼
꼭 흔적을 남기고 사람들을 번거롭게 합니다.
당신이 누구입니까?
묻는 질문에 이렇게 참신한 대답은 처음 들어봅니다.
듣자마자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이렇게 말한 사람이 좋아집니다.
선배 시인은 후배 시인에게 쩔쩔매게 되어있습니다.
이 바닥에서 조금이라도 '쌔거'인 게 후배 시인들이니까요.
자고로 '쌔거'라면, 헌 것보다 성능이 좋을 테니까요.
상은 지나가는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워 슬쩍 쥐어주는 좀 비싼 꽃 같은 거라서,
받는 순간 환해지고 기쁘지만,
그 외에는 무엇도 더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꽃은 기쁘게 받고, 또 다시 갈 길을 가야할 테니까요.
그리고 나서 시인은 김수영 시인의 <꽃잎2>라는 시를 인용하며 마무리했다.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뚫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뚫어지게
10:00 P.M.
행사가 끝나고 남아서 인서트 컷을 찍었다.
그 사이 사람들은 가고 관계자들만 남았다.
촬영을 마무리 하고 가려는데 피자가 왔다.
시인이 쏘는 피자였다.
나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권하지 않았다.
눈 딱 감고 옆 테이블에 가서 말했다.
저도... 이거 먹어도 되나요?
먹으라고 했다.
민음사 직원이냐고 물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이 질문을 도대체 몇 번이나 듣는 거야?
나야 뭐, 영광이지만
‘세 분은 시인들의 친구신가요?’
‘등단 동기입니다.’
‘우왕’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순간 옆에 앉은 남자분이 소리쳤다.
앗!! 그거 내 피잔데!!
저런...
실수로 내가
그 분이 먹다 남긴 피자를 먹은 거다...
더 난감했던 건 우리가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이미 페북 친구였던 것이다...!!
2017년 1월 2일,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시 ‘애인’을 보고 보고 반해 올해 처음으로 페이스북 친구신청을 한 낯선 사람, 유수연 시인이었다.
그도 나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분 내 1호 팬인데 ?
그런데 먹던 피자를 주워 먹다니...
우리는 인증샷을 찍었다.
11:00 P.M.
집 가는 길에 김수영문학상에 대해 찾아보았다.
50편이 넘는 시를 내야만 응모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3일에 한번 꼴로 시를 쓴 것이다.
다작의 비결은 일기라고 했다.
그녀는 매일 일기를 쓰고, 일기로 시를 만든다 했다.
그래서 나도 오늘 처음으로 시를 써 보았다.
제목 - 2017년 12월 27일
서로에게 불만인 점을 말해보자
그들은 내게 차례로 말했다
너는 노쇼가 심하지
오겠다고 해놓고 막상 당일이 되면 안 오곤 하잖아
너는 읽씹이 잦아
제발 답장 좀 해
나는 그 얘길 들으며 조마조마 했다
맞은 편 너에겐
한번도 그런 적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노쇼 했다
어제 본
너의
럽스타그램
(태어나 처음 써 본 시인데 개잘씀)
12:00 P.M.
오늘 참 시같은 하루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언니, 근데 대화명 무슨 뜻이야? 나 안 좋은 추억들이 떠올라...
이거 시야~ 제목은 스무살! 아름답지 않니?
그런데 무슨 추억?
ㅈㄹ의 추억
......
스무 살 조루의 추억인가 보네...
안 됐네 스무살부터...
......
읽씹했다.
그러자 30분 후 또 카톡이 왔다.
‘아직 안 바꿨네? 조루멘트?’
'...'
하... 내가 이 글귀 보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데...
안 본 눈 삽니다...
(시인님 죄송합니다)
새해엔 친구를 좀
가려 사귀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