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인이랑 피자를 먹고 있어서 잠시만

민음사 Dear Poet X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

by 정성은

11:00 A.M.

기상했다.

해야 할 일들이 어렵게만 느껴져 막막했다.



2:00 P.M.

한 줄 짜리 시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끝나는 폭죽을 샀다.’

제목 - 스무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카톡 프로필 글귀로 해 두었다.


시인의 말을 보고 시집을 사기로 결심했다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2012)



3:00 P.M.

역시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나니 조금씩 힘이 났다.

나도 좋은 걸 만들어 내겠다는,

그런 열정이 생겼다.



7:30 P.M.

시 낭독 행사에 촬영을 하러 갔다.

오늘따라 시인들 라인업이 많아,

무슨 시 페스티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등장했다.


문보영 (25, 여성, 피자를 좋아하는 시인)



올해 김수영문학상의 수상자라고 했다.

그제서야 오늘이 시상식이라는 걸 알았다.

시상식 사진들 보면,

대박 지루해보이는 데서 하길래

설마 위트 앤 시니컬에서 할 줄은 몰랐지요~



시인이 운영하는 시집 책방 <위트 앤 시니컬>은 아주 예쁘다. (왼-문보영 오-서효인)



시상이 끝나자 축사가 이어졌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축사 때문이다.

축사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문보영 시인이 본인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자 시키면 딸려 나오는 피클 용기'
결국 국물을 쏟아내 휴지를 찾게 하는 피클처럼
꼭 흔적을 남기고 사람들을 번거롭게 합니다.

당신이 누구입니까?
묻는 질문에 이렇게 참신한 대답은 처음 들어봅니다.
듣자마자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이렇게 말한 사람이 좋아집니다.

선배 시인은 후배 시인에게 쩔쩔매게 되어있습니다.
이 바닥에서 조금이라도 '쌔거'인 게 후배 시인들이니까요.
자고로 '쌔거'라면, 헌 것보다 성능이 좋을 테니까요.

상은 지나가는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워 슬쩍 쥐어주는 좀 비싼 꽃 같은 거라서,
받는 순간 환해지고 기쁘지만,
그 외에는 무엇도 더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꽃은 기쁘게 받고, 또 다시 갈 길을 가야할 테니까요.



그리고 나서 시인은 김수영 시인의 <꽃잎2>라는 시를 인용하며 마무리했다.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뚫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뚫어지게


박연준 시인이라고 했다. 산문도 아름답게 쓰시는 분이라 했다. 당장 읽고 싶어졌다.



10:00 P.M.

행사가 끝나고 남아서 인서트 컷을 찍었다.

그 사이 사람들은 가고 관계자들만 남았다.


촬영을 마무리 하고 가려는데 피자가 왔다.

시인이 쏘는 피자였다.

나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권하지 않았다.

눈 딱 감고 옆 테이블에 가서 말했다.


저도... 이거 먹어도 되나요?

먹으라고 했다.

민음사 직원이냐고 물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이 질문을 도대체 몇 번이나 듣는 거야?

나야 뭐, 영광이지만


‘세 분은 시인들의 친구신가요?’

‘등단 동기입니다.’

‘우왕’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순간 옆에 앉은 남자분이 소리쳤다.


앗!! 그거 내 피잔데!!

저런...

실수로 내가

그 분이 먹다 남긴 피자를 먹은 거다...


더 난감했던 건 우리가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이미 페북 친구였던 것이다...!!



2017년 1월 2일,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시 ‘애인’을 보고 보고 반해 올해 처음으로 페이스북 친구신청을 한 낯선 사람, 유수연 시인이었다.




그도 나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분 내 1호 팬인데 ?

그런데 먹던 피자를 주워 먹다니...

우리는 인증샷을 찍었다.



SNOW가 입술을 원시인처럼 색칠했길래..


11:00 P.M.

집 가는 길에 김수영문학상에 대해 찾아보았다.

50편이 넘는 시를 내야만 응모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3일에 한번 꼴로 시를 쓴 것이다.

다작의 비결은 일기라고 했다.

그녀는 매일 일기를 쓰고, 일기로 시를 만든다 했다.

그래서 나도 오늘 처음으로 시를 써 보았다.





제목 - 2017년 12월 27일


서로에게 불만인 점을 말해보자

그들은 내게 차례로 말했다


너는 노쇼가 심하지

오겠다고 해놓고 막상 당일이 되면 안 오곤 하잖아


너는 읽씹이 잦아

제발 답장 좀 해


나는 그 얘길 들으며 조마조마 했다

맞은 편 너에겐

한번도 그런 적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노쇼 했다


어제 본

너의

럽스타그램




(태어나 처음 써 본 시인데 개잘씀)





12:00 P.M.

오늘 참 시같은 하루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언니, 근데 대화명 무슨 뜻이야? 나 안 좋은 추억들이 떠올라...


이거 시야~ 제목은 스무살! 아름답지 않니?
그런데 무슨 추억?

ㅈㄹ의 추억

......

스무 살 조루의 추억인가 보네...
안 됐네 스무살부터...

......

읽씹했다.

그러자 30분 후 또 카톡이 왔다.


‘아직 안 바꿨네? 조루멘트?’

'...'


하... 내가 이 글귀 보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데...

안 본 눈 삽니다...

(시인님 죄송합니다)


새해엔 친구를 좀

가려 사귀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