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동에서 연남동까지
올해 초 친구들이 연말정산을 하길래 나도 하려고 세무서에 갔다가 퇴짜 맞았다. 직장인들만 하는 거라고, 직장없는 사람들은 5월에 오라고 했다. 달력을 보니 어느새 5월 마지막 주 길래 집에서 편집하다 따릉이를 타고 마포세무서로 갔다. 14만원 벌었다! 평소 궁금했던 세금지식들을 물어보았다. 일년에 얼마 이상 못 벌면 세금 다시 환급해 주는 거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아... 그런 건 아니구요~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을 경우에 그 만큼 환급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영상업을 하신다 했으니 장비를 사거나 하는 영수증들을 모아두면 그만큼 세금을 덜 내도 되는 거죠. 헐... 저 세금계산서 안 끊고 다 현금결제 했는데요... 어머나 그럼 안되요!!! 망했다..
반성하며 집에 가려는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랑 눈이 마주쳤다. 트레바리에서 인터뷰 했던 여자아이였다. 이 동네 산다고, 면접 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반가워서 좀 걸으며 얘기하려 했는데 잠시만요 하더니 어디로 들어갔다. 24시빨래방이었다. 찬물세탁 가능한 빨래터를 찾고 있다고... 미국 영화나 뮤직비디오에서만 보던 빨래방을 실제로 가보니 세탁기들이 엄청 컸다. 내가 들어가도 돌려질 정도... 우린 빨래방을 나오며 말을 놓기로 했다. 나보고 어디 가는 길이냐 묻길래 단추가 떨어져서 옷 수선집을 찾는 중이라 했다. 같이 수선집을 찾으러 다녔고 이내 발견했다. 단추 다는데 5천원이나 해서 눈물이 났지만... 나는 밀레니얼 세대라 단추다는 것도 힘들다... 이제 또 어디 갈거냐 물으니 떡볶이 먹으러 간다 길래 그럼 나도 같이 먹고 싶다고 따라갔다. 가면서 떡볶이 말고 밥집으로 유인했다.
함께 김치 고등어 찜을 먹었다. 밥 먹기 전에 기도를 하길래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나도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선 밥먹기 전에 기도를 해야지 속으로 생각했다. 밥먹는데 요즘 정신상태 괜찮냐고 물었다. 이런 질문을 하다니... 그만 반해버렸다. 자긴 요즘 힘들다고, 알게 되니 너무 많은 것들이 보여 힘들다고 했다. 페미 빨간 약을 먹은 듯 해 보였다. 힘들지만 잘 하고 있는 거라고 으쌰 으쌰 용기를 건넸다!
밥을 먹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이 친구가 면접 봤으니까 끝나고 내가 밥을 사야 할까? 아니야 얜 부자인 것 같은데 각자 낼까? 그런데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언니 제가 밥 사도 될까요? 지금 너무 돈 쓰고 싶어요. 탕진하고 싶어요...' 하... 찔리면서 너무 반해버렸다. 이렇게 반한 김에 집에도 가보고 싶어 끝나고 물었다. 혹시 집 구경해도 되냐고. 사실 요즘 너무 이사하고 싶어서 집을 알아보는데 다들 어떻게 사는지 구조를 보고 싶었다. 같이 집에 갔다. 투룸이고 친구랑 산다 했다. 투룸은 너무너무 좋았다... 신수동이라는 동네였는데 평지고 너무 한적했다. 연대 앞 원룸촌 골목에 있다가 여기 오니 사람 사는 것 같았다. 봉수가 집을 구하며 하루만에 낯선 동네에 반할 때, 뭐야 너무 쉽게 좋아하네~ 싶었는데 그 기분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몇일 전 마포구청역 가서도 새로 지은 마포중앙도서관과 그 옆에 펼쳐진 홍제천을 보며 내가 살 곳은 여기다 싶었거만 여기 오니 또... 남의 동네에 놀러갈 때마다 사랑에 빠지는 걸 보니 서울엔 사랑할 동네가 많나봐. 어디로 이사가야 하나 행복한 고민을 하며 경의선 숲길을 따라 연남동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돈은 없고 아직 상상중에만 있는 이사...)
집에 다 와가는데 거리에서 어떤 개가 미친 듯이 짖고 있었다. 앞에 있는 개를 짝사랑하는 것 같았다. 개가 다른 개에게 신호를 보내는 게 신기해서 쳐다 봤는데 이런... 또 어디선가 본 사람이었다. 1학기만 다녔던 인류학과 대학원에서 만난 중국인 유학생 진니였다... 어머나 진니 강아지 키워요? 너무 반가워요. 오 성은! 젊음의 혈기를 주체 못하는 강아지에게 진니는 끌려가고 있었다... 얘 좀 봐.. 얘 이름 뭐예요? 강아지 이름은 마라탕이에요! 마라탕은 아주 그냥 흥분의 도가니탕이었다... 이름을 부르니 달려와 3중 점프를 하고... 진니 여기 살아요? 나랑 2분 거리에 사네요. 다음에 강아지 보러 갈게요!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그냥 한 말이었다. 그런데 바로 진니가 지금 올래요? 라고 했다. 나는 얼떨결에 어..어?...네!! 했다.
진니 집은 복층이었다... 탁 트이고 넓은 복층을 보니 내가 살아야 할 곳은 복층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어, 근데 진니 오늘 멋지네요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 면접 보고 왔어요! 영어,중국어,한국어 완벽 구사 가능한... 한국어로 엄청 두꺼운 논문까지 쓴 석사졸 진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케이팝 한류로 한국어과에 진학한 진니... 냉장고에는 태연의 사진들이 덕지 덕지 붙어있었다. 처음엔 헤어스타일 모음집인줄 알았는데 자세히보니 얼굴이 다 태연이었다. 사랑해요 김희철 깃발도 걸려 있었다. 귀여운 진니..
무튼 오늘 하루를 겪으면서 동네 친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내 집이 아닌 하숙집에 얹혀 살다보니 뭔가 조금은 정착 못하는 사람 같았는데 내가 이 고장 사람처럼 느껴졌다. 면접 갔다 귀가하는 예쁜 차림의 사람들을 둘이나 마주쳐 그들의 집에도 가보다니 행운의 날이다. 부디 오늘 내가 그들에게 귀인이었기를! 그래서 떡하니 합격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