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행의 추억을 품고 다시 찾은 애월
2년 넘게 계속된 코로나19와 엄마의 건강 문제 등으로 오래도록 멈춰 왔던 우리 가족이 오랜만의 여행지로 제주를 찾게 되었다. 거의 3년 만의 가족여행일 뿐만 아니라, 나 개인적으로도 작년 연말에 다녀온 LA 여행 이후 약 반년만의 여행이었기에 오랜만의 콧바람 쐴 시간이 반가웠다. 2022년이 되자마자 지금까지 쭉 일이 바빴다 보니 주중 평일 한가운데 2박 3일의 짧은 제주 머무름도 아쉬움보단 단비와 같은 시원함이 더 컸다. 잠시나마 서울 스위치를 달칵-! 오프 모드로 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필 회사 업무가 해도 해도 줄지 않고, 회의 한 번에 처리할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요즘이다 보니 한창 근무해야 할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일의 휴가를 내놓은 나는 휴가 전 업무 정리와 인계를 위해 제주도 출발 당일 새벽 3시까지 퇴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땐 한창 신나다가 짐을 싸야 하는 귀찮은 때가 오면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여행이 가기 싫을 수가 없다. 기본적인 짐은커녕 여행 동안 입을 옷도 생각해 놓지 못한 프로야근러는 당장 제주도고 뭐고 푹 쉬고 푹 자고 싶을 뿐이었다.
짧은 쪽잠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뒤 엄마와 동생의 도움을 받아 옷가지 등을 캐리어에 챙겨 넣었다. 이번 여행은 시기가 겹친 어버이날과 엄마의 환갑 생신을 동시에 기념하며 준비하게 되었다. 여행에 앞서 환갑 선물로 오만원권이 줄줄이 달린 금색 풍선과 제주여행용 신용카드를 받으신 엄마는 기분이 평소보다 많이 좋았던 모양이다. 미리 짐을 싸놓지 않은 못한 다 큰 딸의 여행 짐 챙기는 일을 “미리미리 싸놓았어야지.”와 같은 잔소리 한마디 없이 흔쾌히 즐겁게 도와주셨다.
우리의 일정은 비록 3일 내내 비 예보와 함께 시작했지만, 마른하늘에 선명히 나타난 무지개라는 보기 드문 현상이 시작을 장식해 주었다. 덕분에 눈 밑에 달린 피곤의 어두움을 이겨내는 밝고 들뜬 마음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출국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고등학생 수학여행을 비롯한 여러 단체 무리에 꽤나 놀라고 적잖이 당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여행은 왜인지 모르게 과거의 추억을 많이 떠올린 순간들이 많았다. 방구석 나무늘보도 지구 반대편에 가면 부지런한 다람쥐로 탈바꿈하는 LA 여행이 많이 생각나고 있었다. 약 반년만에 찾은 공항, 물론 그때와 달리 이번엔 국내선이지만, 공항이란 장소가 떠올려 주는 지난날의 기억과 기분이 좋았다. 공항 내 신한은행 앞을 지나니 환전을 해야 할 것 같고, 지하철과 연결되는 1층에서 걷다 보니 LA여행길에 함께 올랐던 친구가 보라색 캐리어를 끌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 어떤 여행보다도 특별했던 그날의 추억이 오랜만에 떠오르다 보니 이번 제주도 여행이 그제야 실감 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만큼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아는 가족끼리의 여행. 참 오랜만에 갖는 그 여행의 시간들이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지 기대가 되었다. 나의 세 번째 애월 방문을 통해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 속 다른 사람들과 빚어내는 색깔은 또 어떨지 보고 싶다.
카메라 렌즈와 필름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담을 준비를 하고자 필름 카메라 속 지난 추억을 꺼내기 위해 현상 및 인화가 가능한 동네 사진관에 방문했다. 새 필름을 미리 마련해 두지 못해서 사진관에서 바로 구매하려 했는데, 사진관 사장님의 말씀으로는 필름 대란이 몇 달째 지속 중이라고 한다. 결국 이번 제주 여행에는 필름 사진을 촬영하지 못하게 되었다. 급하게 열심히 검색해서 찾은 김포공항 내 일회용 필름 카메라 자판기의 존재 소식은, 해당 블로그 글의 사진 속 현장에 도착해서야 작년 포스팅의 과거 기록에 불과해 무용지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제주 여행을 떠나기 직전 인화를 맡겨둔 LA에서의 시선들이 제주 애월에 있는 나에게로 전달되었다. 애월에서의 첫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쉬고 있는 동안 이메일로 전송된 필름 인화 결과물들을 받아보니,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만났던 공기가 따듯한 추억 조각이 되어 날아온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지난 여행들이 떠오르는 시간 가운데 실물로 찾아온 사진들이 선물과 같이 느껴져 마음이 몽글몽글 따듯해졌다. 이렇게 여행은 그 순간의 즐거움 자체일 뿐만 아니라, 지난 나의 시선과 지금 나의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행복을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