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그리스 아테네
유럽여행을 준비하면서 소매치기 다음으로 조심하라고 했던 것이 바로 ‘베드버그’였다. 베드버그는 침대에 있는 진드기인데, 물리면 그 간지러움이 상상 이상이고 가지고 간 모든 옷들을 뜨거운 물로 세탁하던지 고온으로 말려야 한다고 한다. 유럽 숙소들 중에는 오래된 숙소가 많아서 관리가 잘 되지 않으면 베드버그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라 한다. 베드버그에 물리게 되면 여행하는 동안 간지러움으로 고생하는 것은 물론 숙소를 옮기거나 가지고 온 옷을 모두 세탁하고 소독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유럽 장기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비용적인 문제 때문에 저렴한 숙소나 호스텔에 묵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베드버그의 위험에 많이 노출되게 된다. 좋은 호텔에 묵었는데도 간혹 베드버그에 당했다는 후기도 있는 걸 봐서는 아무래도 유럽 전반적으로 베드버그에 취약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유럽여행 필수 준비물 리스트에 베드버그 퇴치 스프레이를 꼭 챙기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 그래도 소매치기 방지를 위해서 이것저것 사는 것도 번거로운데 베드버그까지 신경 쓰는 건 너무 유난이 아닐까 하고 우리의 운을 믿고 떠났다.
7일 동안의 이스탄불 여행을 마치고 아테네 숙소로 넘어오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스탄불에서는 나름 3성급이라고 표시된 호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낡고 허름한 한국의 모텔 수준의 호텔이었다. 서비스는 좋았지만 시설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오히려 여기서 베드버그에 물렸으면 물렸지 아테네 숙소에서 물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테네 에어비앤비 숙소는 진짜 너무 좋았다. 넓은 거실과 부엌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화장실도 신식에 넓은 침대와 빛이 가득 들어오는 창문이 있었다. 너무나 쾌적한 환경에 아테네로 넘어오니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문제는 아테네 둘째 날 저녁에 터졌다. 자려고 누운 남편의 등을 보는데 벌레에 빨갛게 물린 자국이 등 옆구리를 따라서 주르륵 일자로 나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을 보니 나는 배와 허벅지에 두드러기가 난 것 마냥 빨간 발진이 올라와 있었다. 가렵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약간 욱신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베드버그가 아닌가 싶어서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이루 지를 못했다. 괜히 계속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지만 달리 잘 곳도 없기도 하고 간지럽지 않은 것을 보니 베드버그가 아닌가 하는 괜한 희망을 품고 의심스러운 침대에서 선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간지럽지 않은 걸 보니 베드버그가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남편의 말은 뒤로 하고 나 혼자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가지고 온 옷을 몽땅 들고 근처 세탁방으로 가서 건조기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근처 약국으로 가서 약사님께 남편의 옆구리에 있는 벌레 물린 자국을 보여주었다. 연륜이 있어 보이시는 약사님은 우리보다 더 안타까워하시더니 꼭 숙소에다가 알리고 후기를 남기라고 하셨다. 이런 식으로 숙박업이 운영되어서는 안 되는데 하시면서 혀를 차시더니 이것저것 약을 챙겨주셨다. 아직은 간지럽지는 않지만 나중에 간지러워질 경우를 대비한 연고와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추천해 주셨다. 베드버그 스프레이는 침대 가장자리와 매트리스 밑면에 집중적으로 분사하고, 침대보는 절대 매트리스 안으로 쑤셔 넣지 말라고 하셨다. 그 침대보를 타고 베드버그가 올라올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아침부터 베드버그에 대한 걱정으로 역동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나니 진이 다 빠져버렸다. 셋째 날은 아크로폴리스 등 고대 유적지를 몽땅 돌아볼 계획이었는데 숙소 베드버그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남편은 숙소에 연락을 취해서 숙소를 소독해 줄 것과 적절한 보상책을 요청했다. 숙소에 머물고 싶지 않아서 시내로 갈 채비를 마치고 서둘러 도망쳐 나왔다. 한참 로마 아고라를 돌아보고 있을 때 숙소에서 연락이 왔다. 숙소 소독은 마쳤고, 살펴보니 침대에 베드버그는 없었고, 아마 소파에 있는 벼룩일 것 같다고 한다. 그래도 베드버그보다는 일반 벼룩이라서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하루치 숙박비와 아침에 약국에서 구매한 연고와 스프레이 값을 보상받았다. 나름 최선을 다한 보상책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였다. 생각해 보니 온몸 전체에 벌레가 물리지 않고 엉덩이와 상반신 위주로 물린 것을 보면 침대가 근원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둘째 날 저녁에 저녁식사를 숙소 소파 위에 앉아서 먹었는데 그게 원흉이었던 것 같다. 소독을 했다고는 했지만 그 뒤로 숙소 소파는 손가락도 건드리지 않았다.
베드버그 같지만 베드버그는 아니었던 작은 해프닝은 둘째 날 선잠과 셋째 날 아침 대혼란으로 막을 내렸다. 그래도 미친듯한 간지러움을 경험하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베드버그에 물리면 거의 일주일 동안은 간지러움 때문에 괴롭다고 하는데 우리는 간지러움 없이 반나절로 힘든 시간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아테네 여행의 초반은 택시 사기로 시작해서 베드버그 해프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해 주었다. 여행은 경험이라던데, 나름 새로운 경험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힘듦으로 겪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게도 이후의 아테네 여행은 너무나 좋은 날씨와 함께 했기 때문에 골목길을 걸어도 기분이 좋았다. 힘듦과 행복을 함께 옆에서 나누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결혼서약을 다시금 되새겨보게 되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아낄 것을 맹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