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제인 Oct 02. 2023

길가에 오렌지 나무라니, 낭만적이야

08. 그리스 아테네

다른 나라에 가면 어떤 나무를 가로수로 쓰는지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이 나라에는 어떤 종류의 나무가 서식하는지, 우리나라에서 많이 보이는 나무들과 어떻게 다르거나 비슷한지 살펴보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가로수가 그 나라의 특징을 요약해서 잘 보여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병풍해에 강한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심는데, 은행나무가 흔하지 않은 곳에서 온 외국 사람들은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가 예쁜 노란색으로 물드는 만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열매를 밟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한국 사람들의 고충은 그 나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하나의 문화가 아닐까 싶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가장 흥미롭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보는 것도 바로 이런 사소한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골목은 어떤 모습인지, 어떤 나무와 꽃들이 길가에 심어져 있는지, 이 나라에서는 몇 시쯤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는지 등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것에 작은 희열을 느낀다. 그 나라 생활상에 대해서 나만의 정의를 내리고 나만의 규정집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바로 내가 여행하는 방식이다.


아테네 외곽의 골목길


아테네에서는 도심 외곽에 위치한 에어비앤비에서 숙박을 했다. 사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도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는데, 장기 여행인 만큼 숙박비에서 절약을 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숙소가 번화가에서 떨어져 있으면 관광보다는 진정한 여행을 하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에서의 첫 아침, 집 근처에 있는 동네 핫한 피자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아테네 시내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갔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생각보다 낙후된 아테네 길거리에 좀 놀랐다. 비좁은 인도, 씽씽 달리는 오토바이들,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제멋대로 칠해져 있는 예술이라고 볼 수 없는 그래피티들이 정신을 산만하게 했다. 특히나 그래피티는 내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유럽 골목을 생각했던 나에게 건물뿐 아니라 지하철에까지 빼곡하게 칠해진 낙서는 내가 알던 유럽이 아닌 할렘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테네는 나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미지로 깊게 박혀있어 뭔가 더 신성하고 고풍스러운 이미지였는데 도시에 뒤덮인 낙서는 내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내 상상과는 달랐던 아테네의 흔한 거리


거리에 들어찬 낙서와 텅 빈 유령 도시 같았던 아테네에 생기와 낭만을 가져다준 건 바로 가로수였다. 세상에, 초록색 싱그러운 잎과 생동감 넘치는 주황색이 어우러진 오렌지 나무가 아테네의 가로수 나무라니! 삭막했던 거리에 불을 밝혀주는 건 별게 아니었다. 나무 한그루 만으로도 갑자기 강도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리가 지중해의 햇살이 내리쬐는 낭만적인 거리로 변해버리니 말이다.


아테네를 아테네스럽게 해주는 나무는 오렌지 나무만이 아니었다. 바로 아테네라는 도시의 이름을 가져다준 ‘올리브 나무’는 아테네의 분위기를 고급스럽게 만들어주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아테네라는 이름이 정해지기 전,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 사이에서 누가 이 도시의 수호신을 할지 경쟁을 했다. 가장 좋은 선물을 주는 신을 택하는 것으로 경쟁은 시작되었다. 바다의 신답게 포세이돈은 바위를 쳐 바닷물을 솟아나게 했고, 아테네는 기름을 짜서 먹을 수도 있고 열매를 그냥 먹을 수도 있는 올리브 나무를 선물했다. 결과는 아테네의 승리였고, 도시의 이름은 수호신이 된 아테네의 이름을 따서 아테네가 되었다.


오렌지 나무로 낭만적인 곳이 된 아테네


올리브 나무는 척박한 아테네 땅에서 잘 자랄 수 있는 나무라고 한다. 아테네 땅은 척박해서 농작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길가에 있는 오렌지 나무에 열린 오렌지는 매우 떫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한다. 아테네의 땅이 척박할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현지 투어를 하면서 새로운 정보도 습득했다. 아테네 땅이 척박한 이유가 수호신 경쟁에서 진 포세이돈이 화가 나서 바닷물을 대지에 뿌려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니, 아테네의 모든 것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로 설명이 가능한 것 같다.


올리브 나무


고급스러운 잿빛의 올리브 나무도, 생동감 넘치는 오렌지 나무도, 다소 황량해 보이는 아테네 도시도 모두 아테네를 아테네스럽게 하는 요소였다. 초여름 3-4시가 되면 자비 없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하기 위해 모든 아파트의 창문에 차양막이 있는 것도, 테라스로 날아드는 새들을 쫓기 위해 반짝이는 CD를 매달아 놓는 것도, 맛없는 오렌지가 달린 멋진 가로수도, 도시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그래피티도 모두 아테네에 직접 가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나만의 아테네 규정집에 저장될, 사소해서 더 소중한 아테네의 매력이다.


테라스를 모두 덮어버리는 차양막


매거진의 이전글 이게 말로만 듣던 베드버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