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쯤엔 흔히 볼 수 있는 고아가 되었다. 누님 집 근처에 홀로 사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을 정리하던 중 오래된 사진 앨범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진 속엔 본인들의 사진보다는 자식들이 커가는 사진과 손주들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전 청년, 소녀의 사진들은 없었다.
그때는 그랬으리라. 강원도 두메산골에 무슨 사진관이 있었겠는가?
돌아가시게 되면, 살던 세월의 흔적을 정리해야 한다. 옷장, 세탁기, 그릇 등을 버릴 땐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냥 가구와 가전제품이니까...,
덮고 계시던 이불을 버릴 땐 눈물이 난다.
입고 계시던 옷은 태운다. 눈물이 한번 더 난다.
소중히 보관한 앨범의 사진을 본다. 눈물을 참을 수 없다. 그냥 흘러내린다.
소중히 간직하시던 앨범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일반 사진의 사이즈의 절반 정도로 남아 있는 오래된 사진,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다. 군복을 입은 젊은 청년의 모습, 흑백 사진이었다.
한 사람은 총을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손을 들고 있었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서로 장난을 치는 듯 보였다.
"오래된 사진 한 장, 그 속에 있던 사람, 그 사람은 아버지"이었다.
결혼 전, 청년의 아버지 사진을 처음 보았다. 군대 막사가 보이고, 비포장 자갈길에, 봉우리가 있는 이름 모를 산봉우리가 배경사진의 전부이다. 저곳은 어디일까?
그리고, 저 총을 들고 있던 친구(?), 전우는 또 누구일까?
아버지는 군생활을 아마도 6.25 전에 하셨으리라. 그 시절,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살아계실 때 듣질 못했다. 부모 자식 간에 조금만 더 대화가 있었더라도 그런 중요한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궁금해서 1950년대의 사진들을 찾아보았더니, 군복과 모자 등이 비슷한 것 같다. 힘겨운 청년의 시기를 보내셨으리라..., 나이를 환산해 보았을 때 6.25 전에 군대 생활을 하셨던 것 같다. 군복이 깨끗하다. 아버지는 키가 작은 셨는데, 전우도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얼굴을 보고, 처음에는 "아버지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진이었으니까..., 그래도, 너무 무심한 아들이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벌써 아버지는 50대 중반이 넘으신 나이이셨다. 아마도 이야기해 주었다 해도 이해도 못했을 것이고, 당연히 궁금해하지도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4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마도 나를 마흔 중반쯤 나이셨던 것 같다. 큰 형님과 나의 나이 차이는 19살이다. 예전에는 가족들이 많은 것이 흔한 경우이었으니까..., 형제들과 함께 살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 당시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어디든 취업을 하고 타지 생활을 하던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기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 기일을 맞이하여, 아버지의 산소를 갔다 왔다.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는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 드렸다. 어려서 "새마을, 환희, 거북선, 장미"등의 담배를 피곤하셨던 것 같은데..., 술은 담근주를 가끔 드셨던 것 같다. 술을 많이 드시고, 술에 취한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며, 아버지의 쉽지 않으셨을 청춘의 세월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안 계시지만, "청년시절의 사진 한 장 정도는 이 세상에 남겨 드려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기억하고 싶은 아버지,
이 세상에 있었던 흔적을 남겨 봅니다."
"아버지의 푸르렀던 청춘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꿈과 희망, 사랑과 열정, 가난과 극복의 시절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힘들게 사셨겠지만, 아버지의 삶, 그 흔적에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 말을 살아계실 적 한 번도 해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삶을 기억하겠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의 아버지(?), 아빠로 살고 있는 저도 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 욕심일까요? 앞으로 남은 인생 충실히, 잘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