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SunnySide of the Street

요정과 함께 걸어온 햇살 같은 시간

by 아토

※ 2022년 12월 24일, 슬럼프에 빠진 작곡가 친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쓴 글입니다.


오늘은 나의 18년 지기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아직도 그녀와의 첫 만남이 생생하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모범생의 틀을 벗어나보려고 재즈밴드에 가입했었고, 음악동아리답게 매주 학생회관의 춥고 커다란 공간에서 합주를 가졌었다. 평소처럼 고군분투하고 있던 그때, 요정같이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내 앞에 뿅 나타났다. 맑고 티 없는 표정으로 아하하하 웃으며, 자기 이름은 여울이고 작곡과에 다닌다고 하였다. 울림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그 이름을 들으며, 참 예술적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동아리의 첫 무대 공연을 준비하며 나는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일 년 사이에 모범생다운 꽉 막힌 인성이 바뀌지 않았던 나는 아무래도 즉흥연주를 할 수가 없었는데, 재즈밴드 본연의 자세를 지켜야 한다는 꼰대 같은 선배들은 무조건 무대 위에서 즉흥연주를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스케일 연습도 해보고, 대가들의 솔로연주를 따라 해 봐도 도무지 답이 안 나와서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다면 즉흥연주를 몇 소절 작곡해 줄 테니 그걸 연습해서 연주하라고 했다. 지금의 나라면 덥석 받아 들고 수십 시간 연습해서 마치 무대 위에서 처음 생각난 소절인 척 태연히 연주했을 거다. 당시의 나는 고마움과 민망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녀가 작곡한 오선지 노트를 받아 들고 즉흥 아닌 즉흥 연주를 겨우겨우 해냈다. 그 징글징글 맞았던 곡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on the sunny side of the street였다.




다정하고 상냥했던 여울과 한층 더 사이가 깊어지는 계기가 생겼다. 내가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그녀와 동아리원들 여럿이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서로 다른 메뉴를 시켜서 먹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그녀가 나의 남자친구에게 자기 볶음밥을 먹지 않겠냐며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다른 남자동아리원도 많은데, 왜 하필 나의 남자친구에게! 그가 또 그걸 좋다고 받아먹었으면 대재앙이 일어났을 텐데, 그래도 눈치가 있었던 그가 한사코 거절해서 해프닝은 일단락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고민했던 것 같다. 왜 여자친구가 있는 앞에서 상대 남자에게 과도한 친절과 호의를 보이는 걸까. 혹시 여우짓을 하려는 걸까. 뮤즈인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자동아리원이 많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의심해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연주가 마음처럼 되지 않아 울고 있는 날 구석으로 끌어다가 손수 오선지에 음표를 그려가며 화성학을 가르쳐주고, 전날밤 한 소절 작곡해 봤다면서 '즉흥연주' 멜로디를 건네던 그녀의 순수성은 도무지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녀를 찾아갔고, 볶음밥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누군가는 너의 순수한 의도를 잘못 해석할 수 있으니 한 번쯤은 그 부분을 생각해 달라는 말을 했다. 내 나름대로는 관계가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마음의 문을 두드렸는데, 그녀는 나의 두드림을 의심 없이 다정한 마음으로 받아주었다. 자신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을 걸어준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친구가 되었다.




평생 나를 키워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나와 이별의 시간을 함께 견뎌주었다. 여울-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면, 아직도 나는 163번 버스 맨 뒷좌석에 둘이 나란히 앉아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오랜 시간 병원 보호자 침대에서 지내며 할머니와의 사별을 준비해 왔지만, 정작 할머니가 떠난 현실 속에 나는 도무지 제대로 서있을 수가 없었다. 코끝을 훅 찌르는 라일락 향기에도 속절없이 괴로워하고 아파했다. 할머니가 안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 어쩔 줄 몰라할 때, 그녀는 함께 163번 버스를 타고 귀가를 해주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날도 평소처럼 같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는데, 정말 햇살이 찬란하고 따사로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 아니라, 찬란한 햇살 속에서 그리움의 향기가 더 짙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배웠다. 그녀의 어깨에 기대서 하늘을 쳐다보며, 햇살이 좋으니까 할머니가 더 보고 싶다는 말을 했고, 그녀는 가만가만 나를 다독여주었다.


이후에 나는 뒤늦게 소명을 발견해서 지방 의대에 진학했다. 외롭게 자취생활을 할 때 종종 그녀가 나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 너무 기뻤던 나는 달그락거리며 햇살 속에서 음식을 준비했고, 그녀는 우리를 감싼 포근한 공기와 달그락 거리는 주방소리와 음식을 하는 내 뒷모습이 좋다며 주변소리를 녹음해 갔다. 같이 순천 송광사를 간 적도 있었는데, 송광사 경내에 졸졸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아름답다며 녹음하던 모습도 선연히 떠오른다. 이후에 그 녹음 소리들을 배경으로 작곡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없지만, 그녀가 했던 숱한 작업들 속의 음표 하나하나에 따스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잘 녹아져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 번은 친구들과 모여 밤새 수다를 떨다가 새벽녘에 잠든 적이 있었는데, 먼저 일어난 그녀가 아침 햇살 속에서 연주하던 그립고 포근한 피아노 선율에 눈을 뜬 적이 있었다. 행복감은 이다지도 구체적인 형태와 질감을 가진 것이었구나 깨닫던 시간들이었다.




여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고학생이었다. 돼지껍데기구이집 위의 고시원에 살며, 학교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면서도, 꿋꿋하게 계속 음악작업을 이어나갔다. 편의점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아쉽고 아팠던 그 마음을, 싸이월드 일기장에 써 내려가면서 여울이는 그렇게 견뎌나갔다. 평범한 한 끼를 사 먹는 일도 망설이던 시절에, 외할머니의 유품인 지갑을 잃어버려 마음 아파하던 나에게 돈을 모아 지갑을 선물했다. 그때 나는 이 친구의 치즈케이크는 평생 내가 사줘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자신의 굶주림보다 타인의 아픔을 먼저 보는 그녀는 내가 아는 중 가장 진한 예술가이다.


그리고 그녀와 만날 때면, 나는 늘,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한 예술가의 시선을 느낀다. 빛도 어둠도 그녀 안에서는 그대로 작품이 된다. 그래서 바흐의 미뉴에트뿐만 아니라 저잣거리의 돌멩이 사진도 그녀에게는 어떠한 망설임 없이 보낼 수 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감동받은 그 어떤 지점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또 그녀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능력을 가졌다. 나는 그걸 세상 만물에 감탄할 수 있는 예술가의 감탄력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고백하자면, 한동안 나는 신포우리만두를 먹을 수 없었다. 그녀를 오랫동안 짓누르던 학자금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대출청산파티를 벌였던 곳이 바로 신포우리만두였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순수한 천재성을 보듬어줄 수 있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서, 그걸 펼쳐내 주기를 나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뉴욕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섭섭한 한편 그녀의 미래를 위해서는 꼭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현실의 제약 조건들 때문에 계속 늦어지고 좌절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안에도 한 겹 한 겹 안타까움이 쌓여왔던 것 같다. 학자금으로부터 벗어난 이후에도 여러 족쇄들이 그녀의 발에 채워지는 모습을 보며, 아직 우리에게는 편안한 마음으로 신포우리만두를 먹을 날이 오지는 않은 건가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어제 그녀를 만나고 오니 마음이 좀 달라졌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은 녹아내렸고, 늘 열심히 견뎌왔던 그녀의 삶에 또다시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싶어진다. 그리고 글을 써놓고 보니 웃기게도, 어제 우리는 우육탕면에 '군만두'를 한알씩 시켜 먹었다. 만두가 세상에 가져다주는 이로움이란!


사랑하는 나의 친구, 장여울아. 병원사회에 나와보니 나는 지방의대를 나온 교수에게는 유리 천장이 있다는 걸 종종 느껴. 그런 거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겨서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만, 어쨌든 현실의 생리는 그런 거 같아. 아마 해외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음악가에게도 마찬가지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하지만 여울이 네가 꿈꾸는 세계는 한예종에서 한자리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어. 너는 어제 나에게, 내 글에는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 녹아있어서 좋다고 하였지. 아마 그건 네가 나를 다정하고 포근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거야. 너는 이미 너의 삶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며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예술을 하고 있어. 네가 작곡 프로그램에 음표를 찍지 않는 그 순간에도.


세상 만물은 시의 재료. 부장님의 재미없는 농담에 영혼 없이 대답하며, useless smile이란 곡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소중한 친구와 내일의 군만두를 사 먹기 위해 오늘의 무미건조한 웃음을 지어내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나는 선율을 안겨줄 수 있는 네가 되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eEc3DVvFhxE

제가 한없이 사랑하는 장여울 작곡가가 지은 음악입니다. 그녀의 순수하고도 따스한 마음이 곡에서 그대로 느껴져서 저는 그녀가 그리워질 때면 종종 듣곤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작업 비하인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이렇습니다.

"중간에 흐르는 이 선율, 혹시 무슨 악기야? 도무지 감이 안 잡혀." 하고 제가 묻자,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답습니다.
"응. 그냥 집에 놀고있던 멜로디언. 초등학생들 수업시간에 쓰는 거 있잖아."
그 순진하고 엉뚱한 대답이 너무 여울다워, 그날 이후 이 곡은 제 마음 속에 ‘요정의 노래’로 자리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