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청년들의 이야기(1) #성장일기
올해 스물일곱, 성장의 기록
스물일곱 대학교 4학년.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어린것 같고 학생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것 같은 지금. 20대를 보내며 조금씩 성장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봤다.
#스무 살. 나는야 재수생.
고 3 때 수능을 망쳤다. 그해 봤던 모든 시험 중에 제일 낮은 점수를 받았다. 수시는 다 떨어졌고 정시는 아예 원서를 넣지 않았다. 재수를 할지 말지 고민을 할 법도 한데 성적이 너무 낮아 오히려 고민이 없이 재수를 결심했다. 재수학원을 알아봤다. ‘선행반’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1월인가 2월부터 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재수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공부를 바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종 성적인 수능 점수가 낮았을 뿐 고3을 놀기만 한 것도 아니고 그동안 수험 생활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친구와 여행도 다니고 충분히 놀고 나서 학원에 들어갔다.
영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기억에 남았던 말이 하나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 가장 중요한 수능 당일날 국어 지문에 무엇이 출제될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읽어봤거나 관심 있는 주제의 지문이 나온다면 행운인 거고 전혀 생소하거나 평소에 약한 부분이 강조되어 나온다면 애를 먹을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날 수업에 충실하고 내가 약한 부분을 파악하고 거기에 시간을 투자하는 거다. 어쩌면 당연한 소리지만 실천은 어려운 일이다. 시험 당일이 다가올수록 이 말은 위안이 됐다. ‘그동안 고생했는데 당일에 망치면 어쩌지?’ 두려움이 찾아들 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스무한 살. 대학교 1학년.
대학교 1학년은 매 순간이 새로웠다. 새터(새내기 배움터)에 가 처음 보는 선배와 동기를 만나 3박 4일을 함께 놀았던 일. 시간표를 짜는 일. 학교 광장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일. 밴드부 농구부 영상제작부와 같은 동아리 활동. 영화제 자원봉사(?) 활동. 낙동강 자전거 종주.
1학년 때는 주위에서 공부하자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수업을 빠지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농구하다 수업이 있는 걸 까먹거나 전날 밤 과음으로 아침 수업에 출석만 겨우 했었던 날의 기억은 있다. 하지만 여러 경험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도 재수할 때도 대학에 가면 많은 사람을 만나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외향적인 데다가 시도하는데 두려움이 적은 편이라 자신은 없어도 안 해본 일은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하나 못한 일은 연애였다. 2학기 때 잠깐 연애를 하긴 했지만 돌아보면 너무 서툴렀다. 표현하는 법도 잘 몰랐고 연애를 하면서도 친구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대외활동을 하는 걸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차였고 헤어지자는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뒤로 볼 수 없었다. 서툴렀던 건 어쩔 수 없었다 쳐도 헤어진 날 이후의 나의 대처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어쨌든 마음을 꺼내 보여주고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인데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끝을 맺는 건 어리석었다.
#스물두 살, 스물세 살. 군인 아저씨.
‘내가 군대?’ 고등학생 때만 해도 정말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1학년이 돼서도 별 생각이 없다가 정말 어쩌다 보니 군대에 원서를 넣고 있었다. 16년 4월. 군대에 갔다. 나이로 치면 이른 편은 아니었지만 우리 과 친구들은 보통 2학년 1학기까지 수업을 듣고 군대에 갔으니 과에서는 조금 이른 편이었다.
운 좋게 카투사로 군대를 갔다. 지금까지도 친구들은 카투사는 군대도 아니라고 핀잔을 놓는다. 하지만 육해공 의경 의방 공익 나눌 것 없이 당시의 나로서는 전역하면(18년 1월) 스물네 살이 된다는 게 조금은 억울했던 것 같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렸으니 미화가 된 것일 수도 있지만, 군대는 좋은 경험이었다.
1) 체력을 얻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달리기랑 농구 말고는 운동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매일같이 (강제로) 새벽에 일어나 맨몸 운동을 하거나 러닝을 했다.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고 저녁에는 헬스도 했다. 딱히 운동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미군들이 체격이 너무 좋다 보니까 뭔가 꿇리기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환경이 정말 좋았다. 체육관도 무료 밥도 무료이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고 게다가 운동을 잘하는 게 군인으로서는 일종의 실력(?)이었기에 꾸준히 운동했다.
2) 사람을 얻었다. 친해지는데 같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고 본다. 게다가 일도 같이하고 놀기도 같이 노는 전우(?)들과 지금도 그때의 일을 추억한다.
3) 사회생활을 익혔다. 행정병 일의 강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무 작업들. 그 외에 가끔씩 총 쏘고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정도 훈련을 갔지만 미친 듯이 힘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사들과 커뮤니케이션, 미군과 일하는 한국군으로서 겪는 애매한 일들, 부대원들과의 갈등 이런 걸 이겨내는 게 관건이었다. 불편한 게 있어도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삶을 겪어보는 것.
물론 안 가도 되는데 갈 거냐고 물어본다면 굳이 가야 할까 싶은 생각은 든다. 하지만 가야 한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가야 한다면’에 의문을 갖는 게 아니라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가장 효율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가는 게 좋다고 본다.
#스물네 살, 스물다섯 살, 스물여섯 살
가장 성장했던 3년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대한 얘기는 따로 쓰겠다.
#가장 최근, 인턴 시작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언론사 인턴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제대로 직장을 구하기 전에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지 알아보고 경험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기말고사 기간 동안에 열심히 채용 공고를 뒤지며 서류를 쓰고 면접을 봤다. 기말고사 전날 한 방송국 리서처 면접을 보러 상암동에 갔다.
총 6명이 함께 면접을 봤다. 모두 여자이고 나 혼자 남자였다. 튀어 보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질문을 받았다. 면접관은 “언론의 신뢰도가 낮다고 하셨는데 5공(제5공화국) 때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아요?”라고 물었다. 사실 질문이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고 ‘5공’이라는 단어만 기억에 분명히 남았다. 당황했다. 생각해 본 질문도 아니었고 80년대의 우리나라 사회상이나 언론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뭐라고 답했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났고 면접이 끝났다.
다른 곳에 서류를 넣어둔 게 있다고 애써 스스로 위로하며 지하철을 탔다. 자취방에 도착해 가방을 챙기고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지 5분이나 흘렀을까.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OOOOO입니다. 아쉽게도 이번 기회엔 함께하지 못하게 됐어요.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기를 바라겠고 하시는 일도 잘 되길 바랍니다 ^^”
서류를 쓰는 일도 면접을 보는 일도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도 정말 체력이 쭉쭉 빠지는 일이었다. 경험도 중요하지만 돈도 필요했다. 안되면 아무 알바나 구하지 싶었는데 코로나로 알바 자리도 없었다. 결국 다시 서류를 쓰고 면접을 봤다. 그렇게 인턴 자리를 구했다.
면접이 인상적이었다. 화상면접도 처음이었고 일대일 면접 또한 처음이었다. 45분 예정이었던 면접은 1시간 20분 정도 이어졌다. 사실은 평소에 잘 알던 회사가 아니라서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면접을 보면서 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언론사에 들어가고 싶었다고 하셨죠? 이번 인턴 경험이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거예요.” 면접을 통해 내가 여기서 일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볼 수 있었고 이분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구해서 좋았지만 부담감도 컸다. 업무 시작하는 날까지 아이템 5개를 가져와야 했다. 어떤 피드백을 들을지 무서웠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덜 알려진 외국 미디어 기업이다 보니 회사와 회사가 하는 일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재택근무에도 적응해야 했다. 첫날 업무를 마치고 선배(면접관이었던)는 전화를 걸어 일해본 소감이 어땠는지 물었다. 이것저것 소감을 말하고 아직은 일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고 덧붙였다.
불안할 땐 오늘 이뤄낸 작은 성취에만 집중해보세요. 줌(zoom)만 쓰다가 구글 미트로 회의를 하게 된 것도 하나의 성취예요.
작가: 윤형
작가 소개: 호기심 풍부한 청년 윤형입니다. 미디어와 다양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본 매거진은 청년들의 지식커뮤니티 눈랩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함께 작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