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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z Sep 20. 2024

당근중독

 작업실을 새로 얻은 지 벌써 8개월 하고 5일이 지났다. 4명이 함께 쓰는 12평짜리 공간을 냉장고, 소파, 싱크대, 책상, 회의테이블, 진열장으로 가득 채웠다. 물건은 이것저것 사서 쟁여뒀는데 정작 수납할 공간이 부족했다. 내 책상서랍도 정리안 된 물건으로 가득 차 뒤죽박죽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몇 년 동안 사용 안 하던 앱을 다시 켰다. 당근마켓, 요즘 당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새 걸로 사기엔 돈 아깝고, 남이 쓰던 거라도 적당히 좋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득템 할 수 있어 실생활에 유용한 중고거래장터. 한번 시작하면 새 제품을 살 수 없게 된다는 그 앱을 열었다. 


 어머, 세상에나! 온갖 물건들이 판매자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합리적이라 느껴지는 가격에 올라와있는 게 아닌가. 왜 지금까지 이걸 안 봤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당근에 빠져들고 있었다. 20분 전에 새로 올라온 빨간색 캐비닛이 눈에 들어왔다. 단돈 2만 원. 망설임 없이 판매자에게 연락했고, 그렇게 나의 당근 첫 구매는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요즘말로 ‘쿨거래’를 한 셈이다. (쿨거래는 간단한 절차만 거치고 시원하게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말)


 ‘쿨거래’ 이후로 당근에 들어가는 날이 많아졌고, 당근에 접속할 때마다 도파민이 샘솟았다. 조금씩 중고물품 구입의 매력에 빠져든 것일까. 새것 같은 중고를 볼 때는 가슴이 뛰기도 했다. 새벽까지 당근을 들여다보다가 늦잠 자는 일도 생겼다. 사고 싶은 욕구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타나면 그 물건이 나한테 필요한 이유를 찾았다.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주말 오후, 작업실에 나와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에 자꾸 시선을 뺏겼다. 당근 판매목록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6개월 사용한 주방수납장, 만오천 원에 팔아요!>라는 제목을 발견했다. ‘만오천 원이라고? 이건 완전 거저네.’ 좀 무겁다는 판매자의 말에 작업실에서 조용히 일하고 있던 후배를 데리고 신월동 주택가에 도착했다. 


“혹시 당근이세요?” 

“네!”  


 한 아주머니가 골목에 서 있었다. 다가구 주택 2층 위에 주방수납장이 나와있었다. 깔끔한 화이트톤의 수납장을 판매자 아주머니가 반짝반짝 닦아놓으셨다. 한눈에 봐도 그냥 새 제품이었다. 오늘 정말 득템 했구나. 


“근데 이거 정말 무거운데 들고 가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저희 둘이서 같이 들면 되죠.”

“정말 무거운데...” 


 후배와 함께 호흡을 맞춰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 헉, 예상했던 무게가 아니었다. 근데 문제는 수납장의 무게가 아니었다. 수납장은 어찌 들어 올리긴 했지만 가파른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게다가 계단 폭이 너무 좁아 수납장이 난관에 닿으려 하고,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려온 땀방울은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고, 양쪽 모서리를 꽉 잡고 있는 손은 스르륵 힘이 빠지면서 수납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쿵, 찌지직~’


 아찔한 순간이었다. 털썩 계단에 수납장을 내려놓고 말았다. 유난히 반짝이던 하이그로시 수납장 옆구리가 긁히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허리를 깊이 숙이고 요상한 자세로 아슬아슬한 계단을 한 칸씩 들었다 내려놨다를 반복하면서 힘겹게 내려갔다. 고작 열 개 밖에 안 되는 계단을 다 내려오고 나니 온몸이 땀투성이가 됐다. 지옥의 계단을 지나고 나니 준비해 온 끌차에 수납장을 싣고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천국이었다. 아니, 천국이 아니라 다시 더 큰 지옥의 문이 열렸다. 


*수납장의 크기 = 가로 60* 세로 55* 높이 88 (cm)

*당근으로 첫 구매한 캐비닛 = 가로 40* 세로 40* 높이 125 (cm)


  지난번엔 1미터 25센티나 되는 캐비닛을 내 승용차 뒷좌석에 싣고 왔었다. 하지만 이번엔 문입구부터 수납장이 걸려 들어가지 않았다. 높이가 문제가 아니라 세로폭 55센티가 문제였다. 방향을 틀어도 도무지 방법이 없어 보였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 정도 사이즈는 실릴 거라 생각해 치수를 재어보지 않은 내 잘못이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돈이 좀 들더라도 수납장을 실을 수 있는 봉고차를 불러야겠다 생각해 ‘타다’에 문의하니 화물은 실을 수 없단다. 용달차를 부르려고 알아보니 추석연휴라 당장 달려올 수 있는 차는 없었다. 


 그 사이 신월동 골목에 짙은 어둠이 내렸다. 얼떨결에 따라온 후배와 갈 곳 잃은 수납장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캄캄해졌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그냥 판매자에게 다시 돌아가 돌려줘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면서 오도 가도 못하고 시간은 계속 흘렀다. 


“SUV차에는 실릴 것 같은데... ” 


 혼자 중얼거리던 후배가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SOS를 청했다. 30분쯤 기다렸을까. 어두운 골목에 한줄기 빛처럼 후배친구의 SUV가 들어서는 게 보였다. SUV 차트렁크에 수납장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돌렸다. 우리는 늦은 시간 한걸음에 와준 친구에게 외식상품권을 선물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이었지.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이럴 거면 차라리 새 걸 사는 게 낫겠다. 만 오천 원짜리 수납장을 물건 값의 몇 배나 되는 수고비를 주고 구입했다고 생각하니 속이 좀 쓰라렸다. 치수를 좀 재어보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는데 싸다고 무작정 구입한 결과가 남긴 교훈이었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어쩌겠냐만 예상치 못한 지출 생각에 뒤척이며 잠 못 드는 밤이었다. 


 다음날 수납장을 보니 작업실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하이그로시 광이 반질반질 살아있어 새것처럼 너무 예뻤다. 함께 고생한 후배와 나는 매우 흡족해했다. 그리고 ‘어제의 어이없는 사건’이 떠올라 웃었다. 잊을 수 없는 ‘당근의 추억’ 하나가 생겨버렸다. 다음에는 쿨거래보다 더 신중한 거래를 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도 난 당근마켓의 새로운 판매자와 채팅 중이다. 


“판매자님, 안녕하세요. 오늘 거래 가능한가요?”

“네, 저녁 8시에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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