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돌아가야 한다

by 시우

나는 돌아가야 한다


퇴근길. 이른 찬바람에 붕어빵 한 개를 사고 잔돈이 없어 만 원짜리를 냈더니, 아주머니는 돈은 그냥 가져가라며 물리셨다.


머쓱하게 손을 거둬 돌아서서, 붕어빵 한 입을 베어 물며 건널목을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내달린다. 마을버스가 멀리서 굽어 들어오면, 깔때기 주둥이 따라 빈 병에 물 흘러들 듯, 우르르 두서없이 모여 종종걸음으로 어깨 부대끼며 버스에 올라 빈자리에 들고, 늦은 이들은 손잡이를 몸에 당겨 서로의 등을 마주하고 섰다.


차창 너머 붉푸른 네온사인 어른거리는데, 꼬리를 문 차들이 뿜는 빛의 행렬이 길게 늘어진다. 밤 11시. 서울의 하루는 저물 줄을 모른다.


어두운 불빛 아래, 버스 안 풍경은 심심하지만 다채롭다. 수험생으로 보이는 소녀는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고, 그 곁엔 앳된 두 남녀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묻는다. 취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큰 소리로 떠드는데, 다른 이들은 무심히도 전화기를 만지작거린다.


개그프로그램을 보는 사람과 소심하게 어깨 너머로 엿보는 이들은, 빵 터지는 순간에 서로를 돌아본다. 지친 고개를 떨궈 끄덕끄덕 조는 사람이 있고 또, 내리는 문 주위에서 중국동포 여럿이 낯선 억양으로 뭔가 심각하게 소근 거린다.


좌회전 신호를 받아 버스가 급히 방향을 틀면, 가는 길 반대로 모두 다 함께 몸이 기운다. 차가 서자 난 빈자리에 앉으니, 그 사람이 남긴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북적이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고등학교 급우였던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고 알고 있었다. 애써 서로 모르는 척 눈길을 멀리했다. 종점에 다다라 차가 멎자 짐을 챙겨 바쁘게 제 갈 길을 간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비슷한 모양으로 만나겠지만 서로 인사도 없다.


길 가 순대국밥 집에는 담배연기 자욱하고, 그 사이에 홀로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아버지 또래의 늙은 남자가 보인다.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과 감자 칩 한 봉지를 사서, 언덕을 올라 집에 이른다. 맞아주는 어머니를 심드렁하게 외면하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한 끼니를 위해 혼잡한 출근 시간에 지하철 객실에서 어지럽게 흐트러진 신문지를 모아 고물상에 파는 노인들. 새벽같이 출근해서 늦은 밤 퇴근 하면서도 매일 매일의 삶에 허덕이며 미래에 불안해하는 이들. 취업이 안 되어서 몇 년 째 백수생활하고 있거나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토로하던 후배들의 이야기.


주택 대출금 때문에, 아이 분유 값을 벌려고, 자식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초라한 안전망에 기대어, 그 어떤 다른 선택지도 고려할 여유가 없는 친구들. 실적이 인격이라며 다그치는 부장님과, 한 달에 한번 받는 월급을 뽕 맞는 것이라 자조하던 동료들.


대학시절, 생을 걸어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자고 다짐하더니, 하나 둘씩 현실 속에서 소시민으로 세상과 타협하다가, 너무나 초라해진 자신을 소주 한잔, 담배 한 모금에 달래고 위로하던 친구들.


십년 전, 나의 퇴근은 끝났다. 그러나 나는 잊지 않는다. 그들의 아픔을 나의 슬픔을. 그리고 나는 안다. 그 마음이 서원의 씨앗이 되어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는 것을. 모든 부처님이 그러하시었듯 중생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참된 수행은 시작된다.


자비로 고통 받는 중생을 건지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반야심경般若心經 맨 앞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나는 스스로를 불살라 어두운 세상의 등불이 된 노동자의 일기 한 구절을 빌려 다짐한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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