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밝고 훈훈하게

by 시우

맑고 밝고 훈훈하게


“인감도장 주세요.” “지금 없는데...” “엄지로도 되요.”

손목을 끌어 인주 묻힌 손가락을 계약서에 지그시 눌렀다. 아파 입원한 병원까지 찾아가 기어이 편의점 가맹 계약을 마무리 짓는다. 이미 반승락을 얻어놔, 사나흘 여유 둬도 어그러질 일은 아니었지만, 실적 마감이 내일이라 기어이 끝내고 만다.


지난 두 달여, 신참으로 점유율 1위 지역에서 상권분석과 계약업무를 맡은 이래 내내 허탕 쳤다. 그 와중에 경쟁사는 점포수를 부지런히 늘려 턱 밑까지 쫓아왔다.


마냥 넋 놓고 있지는 않았다. 명당이다 싶으면 크던 작던 가리지 않고 들어가, 건물주를 만나면 임대료를 흥정하고, 슈퍼마켓 사장을 만나면 가게를 넘기라고 들이댔다. 그러나 내 딴엔 장사하기 좋은 자리라고 보고하고서 과장님께 핀잔듣기 일쑤였고, 제 발로 찾아온 고객도 놓치기 다반사였다. 외근 마치고 빈손으로 부장님 눈 마주치기가 그리 두려울 수 없었다.


내민 명함을 밀쳐내는 거친 손길. 잡상인으로 몰아내는 성난 눈빛...남의 주머니에서 돈 꺼낸다는 건 이만저만 가슴 조리는 일이 아니다. 이따금 제부도濟扶島 방파제에 걸터앉아 지는 해를 보며 회 한 접시를 두고 소주를 마셨다.


지장指章 찍힌 계약서를 들고 돌아가는 길에, 새 편의점이 들어설 주변 소매점을 둘러본다. 구멍가게에 의지해 사는 네 식구가 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고, 또 다른 점방 할배는 육사 다닌다는 막내아들 사진을 자랑스레 보여준다. 그들이 눈앞에 올 대기업을 이겨낼 길은 없다. 나는 미리 온 저승사자였다.


전화벨이 울린다. 만취한 가맹점주다. 자기 점포 근처에 매장이 생긴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회사 앞 동수원 사거리를 트럭으로 막아버리겠다고 으름장이다. 상권 안 겹치니 걱정 말라는 불안한 약속을 한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오~~Hero” 부장님 ‘엄지 척’에 뭇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베테랑마저 죽 쑤던 그달 실적을 막내 혼자 다 해냈다. 자존심 상한 선배는 먼저 퇴근한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사표를 냈다.


비포장 길. 자욱이 이는 먼지를 가르고, 뉴욕 원다르마센터(Won Dharma Center)에 다다랐다. 그만둔 옛 직장 회장님 일가의 사재로 지어진 도량이다. 큰 부富를 부처님 앞에 내 놓은 마음을 기릴 때, 그 돈이 쌓이기까지 얽혔을 가지가지 사연도 떠올랐다.


인건비 아낀다고 밤낮 2교대하던 부부. 컵라면으로 끼니 때우던 손님. 알바비를 왜 적게 주냐고 펑펑 울며 따지던 여대생. 월세 갖고 거드름 피우던 건물주. 7시면 출근해 사원들을 독려하던 사장님. 프랜차이즈 체인의 공세에 버티다 망해가던 골목상점들. 그리고 나의 사회 초년병 시절.


수행자는 기부자의 재물을 좇지 않는다. 보시하는 그 마음을 살려 너른 세상에 두루 복이 되도록 인도하는 스승이며, 돈에 묻어온 고통과 슬픔까지도 풀어내는 데 수도인의 보이지 않는 적공이 있다. 참된 수행처는 맑고 밝고 훈훈하다.


내가 어느 날 아침 영광에서 부안 변산 쪽을 바라다보매 허공 중천에 맑은 기운이 어리어 있는지라, 그 후 그 곳으로 가 보았더니 월명암에 수도 대중이 모여 들어 선을 시작하였더라. 과연 정신을 모아 마음을 맑히고 보면 더럽고 탁한 기운은 점점 가라앉고 신령하고 맑은 기운은 구천九天에 솟아올라서 시방 삼계가 그 두렷한 기운 안에 들고 육도 사생이 그 맑은 법력에 싸이어 제도와 천도를 아울러 받게 되나니라. - 원불교 대종경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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