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판의 의학용어, "학교가야지~"

의학용어 ante

학창 시절, 우리 학교에는 포커 게임이라는 기묘한 열병이 휩쓸고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본래 도박과는 거리가 먼, 그저 구석에서 조용히 책이나 읽는 것을 선호하는 학생이었지만, 거대한 또래 집단의 압력 앞에서는 저항할 재간이 없었죠. 그 포커 판에는 아주 엄격한 규칙이 하나 있었는데, 게임에 참여해 숨이라도 쉬고 싶다면 무조건 기본 판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멍하니 앉아 패를 기다리고 있으면, 친구들은 여지없이 핀잔을 주곤 했습니다. 야, 너 학교 안 가고 뭐해? 여기서 학교 간다는 말은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뜻이 아니라, 게임을 시작하기 위한 기본 판돈, 즉 앤티(Ante)를 내라는 용어였습니다. 아마 80년대 학교를 다녔던 분들은 모두 기억하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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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앤티라는 단어의 뿌리를 파고들어 보면 꽤 흥미로운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실 앤티는 라틴어 전치사 ante에서 왔습니다. 그 의미는 아주 직관적이게도 시간적으로는 ~전에, 공간적으로는 ~의 앞에를 뜻합니다. 카드를 받기도 전,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내놓아야 하는 돈이니 이보다 더 정확하고 적절한 작명은 없을 겁니다.


일상영어에서도 up the ante 라는 표현이 흔히 사용됩니다. 말그대로 판돈을 올리다, 승부스를 던지다, 무리를 하다부터 기준을 올린다는 뜻까지 다양하게 사용되는 관용구입니다.


Let's up the ante. (우리 판 좀 키워보자. / 좀 더 세게 가보자.)

He upped the ante to impress her. (그는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더 비싼 선물을 했어. / 무리 좀 했어.)

The company upped the ante with a new design. (그 회사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승부수를 던졌어.)

The film ups the ante on special effects. (그 영화는 특수효과에 대한 판을 높였어/기본 판돈을 올렸다)


우리가 흔히 난해하고 복잡하다고 느끼는 의학의 세계에서도 이 라틴어 전치사는 놀라울 정도로 자주 등장합니다. 의사들이 앤티라고 웅얼거린다면, 그건 십중팔구 무언가의 앞쪽 위치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시간을 가리키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앤테리어(Anterior)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발음은 꽤 학구적이고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상 그 뜻은 허무할 정도로 단순한 앞쪽입니다. 만약 의사가 차트에 심각한 표정으로 앤테리어라고 적는다면, 그건 그냥 환자의 몸 앞면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뒤쪽이 아니라요. 의사들은 가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라틴어로 포장해 환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꼭 병원 문턱을 넘어야만 보이는 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 고대 로마어와 마주하거든요. 오전 7시를 뜻하는 7 a.m.에서 a.m.이 바로 앤티 메리디엠(Ante Meridiem)의 줄임말입니다. 메리디엠은 정오, 즉 해가 가장 높이 뜬 한낮을 의미하니, 정오가 되기 전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매일 아침 시리얼을 먹으며 라틴어를 읊조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의학 용어로는 앤티파텀(Antepartum)이 있습니다. 여기서 파텀(Partum)은 출산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두 단어를 합치면 출산 전, 즉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시기를 뜻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포스트(Post, 뒤)를 붙인 포스트파텀(Postpartum, 산후)과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말이죠.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들면 마치 외계어처럼 갈갈이 휘갈겨 쓴 약어들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앤티는 숨어 있습니다. 개중 흔하게 보이는 a.c.라는 글자는 앤티시범(Antecibum)의 약자입니다. 여기서 시범(Cibum)은 음식을 뜻합니다. 즉 식사 전에 약을 먹으라는 아주 중요한 지시사항을, 의사들은 굳이 고대 로마인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는 것을 즐깁니다. 밥 먹기 전에 드세요라는 간단하고 친절한 말을 앤티시범이라고 적어 놓으면 뭔가 더 의학적인 권위가 서는 모양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의 팔에도 앤티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전완이라고 부르는 팔뚝을 의학 용어로는 앤티브라키움(Antebrachium)이라고 합니다. 브라키움(Brachium)이 팔을 뜻하는데, 팔 중에서도 더 앞서 나가는 부분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누군가와 악수를 하려고 손을 뻗을 때 가장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그 부분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조차도 이 단어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앤티모텀(Antemortem)은 사후를 뜻하는 포스트모텀(Postmortem)의 반대말, 즉 죽기 전 살아생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법의학 드라마에서 부검의가 상처를 가리키며 이건 앤티모텀 손상입니다라고 한다면, 피해자가 살아있을 때 입은 상처라는, 꽤나 섬뜩하지만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Ante
'~전에(before)'

- Anterior (앤테리어): 신체의 '앞쪽' 면을 가리키는 의학/해부학 용어.

- a.m. (Ante Meridiem, 앤티 메리디엠): '정오(Meridiem) 이전', 즉 오전을 뜻하는 줄임말.

- Antepartum (앤티파텀): 출산(Partum) 전의 시기.

- a.c. (Antecibum, 앤티시범): 처방전에서 사용되는 약어로, 음식(Cibum) 전, 즉 '식전 복용'을 의미.

- Antebrachium (앤티브라키움): 해부학적으로 팔(Brachium)의 앞부분인 아래팔(전완)을 지칭.

- Antemortem (앤티모텀): 죽음(Mortem) 이전, 즉 살아생전의 상태. (사후인 Postmortem의 반대)


그렇게 당시엔 그렇게 의학용어를 공부하면서도 이 엔티가 의학용어라는 생각은 못했던 같습니다. 엔티라는 발음 때문에 반대를 뜻하는 anti와 햇갈리시면 안됩니다.

의학 용어라는 울창한 숲을 지나다 보면 이 앤티라는 표지판을 수도 없이 마주치게 되는데, 오늘 제글을 기억하신다면, 그때마다 로마인들이 남겨놓은 이 짧은 전치사의 의미를 쉽게 떠올길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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