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가운 속의 '노가다', 진료실 속 일본어의 잔재들

일본식 의학용어


우리는 흔히 공사판에서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속칭 '노가다'라고 부릅니다. 일본어 '도카타(土方)'에서 온 이 말은 고된 노동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단어들은 단순한 외래어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억압의 시간을 거치며 한국어의 살가죽 아래 문신처럼 새겨진 '일제의 잔재'입니다. 무심코 튀어나오는 역사의 찌꺼기들입니다. 그런데 가장 지적이고, 가장 과학적이어야 할 대학병원 진료실에서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주고받는 전문 용어들에도 '노가다'나 '간지'와 같은, 일본을 거쳐 변질된 '언어의 짝퉁'들이 있습니다.


아래 단어들의 의미와 영어권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아시나요?

기브스, 깁스

가제

메스

노이로제

압뻬


일상생활에서도 드라마에서도 '기브스(Gips)'라는 말 자주 쓰지요? '기브스'는 석고(Gypsum)를 뜻하는 독일어 'Gips'에서 유래했습니다. 재료의 이름이 시술 자체를 통칭하는 단어로 굳어진 셈인데, 이 또한 일본을 경유한 독일 의학의 잔재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캐스트(Cast)'라고 표현합니다. 석고를 사용하지 않는 부분 고정은 스프린트(splint)라고 합니다.


수술용 칼 '메스'는 역사가 조금 더 깊습니다. 일본이 독일 의학을 받아들이기 전, 에도 시대에 네덜란드 의학(난학)을 먼저 접하며 들어온 네덜란드어 '메스(Mes, 칼)'가 그 기원입니다. 이것이 일본어의 외래어 표기 그대로 한국에 들어와 굳어졌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스칼펠(Scalpel)'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본이 개화기에 쓰던 네덜란드어 단어를 쓰고 있는 셈입니다.


의료현장에서 상처를 덮는 '거즈(Gauze)'를 흔히 '가제'라고 부릅니다. 원래 독일어로는 '가체(Gaze)'가 일본어의 음운 체계를 거치며 '가제(ガーゼ)'가 되었고, 한국에서는 '거즈'와 혼용되거나 굳어졌습니다.


중요! 간혹 깁스는 엉터리 영어고 캐스트라고 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림들이 있는데, 무식한 거에요. 메스는 틀린 표현이고, 스칼펠이라고 해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의학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영어 기반의 의학용어가 많이 사용될 뿐입니다. 문제는 이런 의학용어가 일제시대에 시작되었고, 그 잔재가 지금 의료현장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이죠.


한국 진료 차트를 보면 가끔 정체 불명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appe입니다. 보통 아뻬, 혹은 압빼라고 읽습니다. 이 역시 일본식의 발음입니다. 독일어 '아펜디치티스(Appendizitis)'라는 긴 단어를 일본 의사들이 제멋대로 앞 두 글자만 뚝 잘라 '아뻬(アッペ)'라고 줄여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아'로 줄이듯, 일본식 편의주의가 만든 조어입니다. 이것이 그대로 한국에 들어와, 광복 8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엘리트 의사들은 "오늘 아뻬(appe) 환자 있다"라고 말합니다. 미국 의사에게 "아뻬(appe)"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appe가 아니라 Appy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흔하지는 않습니다. 한국 의사가 미국 병원에 가서 "아뻬 수술(Appe op)"이라고 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가장 극적인 언어의 왜곡은 '엑기스'에서 발견됩니다. 본래 '추출하다', '농축액'을 뜻하는 영어의 'Extract' 혹은 네덜란드어의 영향이 섞인 이 단어는, 일본인들이 이 단어를 처음 받아들일 때(에도 시대 난학), 뒷부분인 '-tract'를 잘라내고 앞부분인 'Ex-' 소리만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한국으로 넘어와 '엑기스'라는 된소리로 변질된 것입니다. ('아뻬'처럼 일본 특유의 줄임말 습성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게 진짜 엑기스다"라는 표현을 쓰지만, 정확한 표현은 '추출물(Extract)'이나 '농축액(Concentrate)'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마지막으로 현대인의 정신 건강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노이로제'가 있습니다. 이는 신경증을 뜻하는 독일어 '노이로제(Neurose)'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영어권에서는 '뉴로시스(Neurosis)'라고 칭합니다.




언어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시대의 권력을 반영합니다. 광복 후 미군정을 거치며 한국 의학의 표준은 미국식으로 급격히 이동했습니다. 현대 차트에는 주로 영어가 쓰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순우리말로 바꾸려는 노력이 활발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메스'와 '기브스', '엑기스'는 우리 의학이 걸어온 굴곡진 경로를 증언합니다.


가제는 틀리고 거즈라고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깁스라고 한다고 해서 무식한 것도 아니지요. 의학용어는 나라마다 다를 수 있고,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단어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역사의 좌표를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포커판의 의학용어, "학교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