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새해!
올해에는 스펙 좀 올리게 외국어도 열심히 하고, 자격증도 따고, 인공지능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스펙을 올린다, 스펙이 좋다고 할 때 스펙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만약 당신이 런던의 펍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옆자리 신사에게 "당신의 스펙(specs)은 정말 훌륭하군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마 콧등에 걸친 안경을 고쳐 쓰며 당황스러운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영어권, 특히 영국에서 ‘specs’는 ‘spectacles(안경)’의 게으른 줄임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의 학벌이나 경력을 칭찬하려 했다면, 그 시도는 완벽하게 실패한 셈입니다.
스펙(spec/specs)
= 보다(to look)
이 모든 오해의 뿌리에는 라틴어 ‘스페케레(specere)’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보다(to look)’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로마인들이 세상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던 강박의 산물입니다.
spectator는 보는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관중이 되었고,
prospect는 미리(pro) 본다(spect)라는 의미에서 전망이 되었습니다.
inspect는 안까지 꼼꼼히 검사(감사)한다는 뜻이고,
spectacular는 볼만한, 즉 눈을 뗄 수 없다는 의미에요.
이 단어들은 모두 ‘보는 행위’에 집착합니다. 안경을 뜻하는 spectacles 역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행위에서 온 것이니, 런던의 그 신사가 당신의 칭찬을 안경에 대한 찬사로 받아들인 건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입니다.
Spec이란 단어는 ‘specification(사양서/설명서)’의 약자이기도 합니다. 본래 specification은 엔지니어가 기계를 만들거나 평가할 때, 그 세부 사항을 현미경 들이대듯 꼼꼼히 ‘들여다본다(specere)’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아마존에서 최신형 아이폰이나 80인치 TV를 고를 때 마주하는 그 건조하고 지루한 표들을 떠올려보십시오. 배터리 용량, 화면 해상도, 무게, 방수 등급 따위가 적힌 목록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specification, 줄여서 ‘spec’입니다.
미국에서 누군가 "스펙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대상은 당신의 이력이 아니라 십중팔구 당신의 랩탑이나 자통차에 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스펙’이라는 단어는 태평양을 건너오며 아주 기묘한 배달 사고를 겪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한국에서는 이 차가운 공학적 용어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에게 갖다 붙였습니다. 우리는 취업 시장이라는 거대한 쇼윈도 진열대 위에서, 우리 자신을 고성능 가전제품처럼 소개합니다. "이 인간의 토익 점수는 900점이며, 인턴 경험이라는 최신 소프트웨어가 탑재되어 있고, 해외 연수라는 옵션도 추가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을 기계의 사양서(spec)로 환원시키는 이 현상은, 우리가 서로를 인격체가 아닌 기능적 도구로 ‘바라보고(specere)’ 있다는 씁쓸한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영어권 화자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기계에나 쓰는 단어를 붙이는 무례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대신 그들은 ‘크리덴셜(credentials)’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credential’은 ‘믿다(credere)’라는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즉, 그 사람의 능력을 서류상의 수치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채용한다는 건 그 사람의 사양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배경과 자격을 믿어주는 행위여야 한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습니다. 물론, 현대 사회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우리가 인간보다는 성능 좋은 로봇이 되기를 강요받는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굳이 우리가 스스로를 신형 진공청소기와 같은 선상에 놓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She has impressive credentials, including a Ph.D. from MIT and ten years of experience in the field.그녀는 MIT 박사 학위와 해당 분야에서의 10년 경력을 포함해 인상적인 스펙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다음번에 누군가 당신의 ‘스펙’을 묻는다면, 잠시 안경을 만지며 이렇게 말씀해 보십시오. 제 안경이 마음에 드시나요? 그리고 짐짓 모른 척 당신의 ‘크리덴셜(credentials) 이야기를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그게 훨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스펙터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