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성준의 리뷰] - 『금융 오디세이』
멋진 양복을 차려입은 두 노인네가 화장실 바닥에 엎드려 안에 누가 있는지를 살핀다. 화장실에 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노인들은 각자 지갑에서 1달러짜리 지폐를 꺼낸다. 이들은 증권 중개 회사를 경영하는 재벌 듀크 형제인데 돈이 남아돌다 보니 너무 권태로워서 늘 하던 대로 일 달러짜리 내기를 하는 중이다. 문제는 이번 내기의 주제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그가 처한 환경일까 아니면 유전적 요인일까?'라는 것인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은 멀쩡하게 회사를 잘 다니고 있던 회사 중역 루이스 윈슬롭(댄 애크로이드)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사악한 형제는 마약 밀매와 좀도둑의 누명을 씌워 그를 회사에서 내쫓고 그 자리를 노숙자였던 발렌타인(에디 머피)에게 준다.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환경을 두 사람에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건 발렌타인이 화장실 안에서 우연히 그들의 수작을 다 들었다는 사실이다.
대마초를 몰래 피우느라 변기 위에 올라가 쭈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듀크 형제가 거기서 비밀을 발설한 것이다. 애디 머피와 댄 애크로이드가 주연한 《에디 머피의 대역전(Trading Place)》이라는 이 작품은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가벼운 80년대식 코미디지만 돈에 대한 섬뜩한 통찰을 전해주기도 한다. 거칠게 말해서 인간의 운명이 1달러로도 바뀔 수 있다는 얘기이니 과연 돈 앞에서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어렸을 때 비디오로 봤던 이 영화를 왜 떠올리게 되었는가 하면 메디치미디어에서 이번에 보내온 책의 제목이 『금융 오디세이』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을 전해 들은 나는 깜짝 놀라서 "저는 돈에 대해 아는 게 진짜 하나도 없는데요?"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경제사를 다룬 역사서에 가깝고 흥미로운 인물들이 많이 나오니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라는 태평한 답이 돌아왔다.
책이나 기사를 읽을 때도 숫자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건너뛸 정도인 내가 과연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시작한 독서였지만 막상 첫 장을 여니 코로나 19와 맨해튼 월가 점령 시위 등 시사적인 관점의 글이 더 많았다.
이 책은 중앙은행 베테랑 뱅커라고 할 수 있는 차현진 국장에 10년 전에 냈던 책인데 요즘 재택근무가 확산되면서 입소문이 퍼졌고 뒤늦게 SNS 인플루언서들이 추천도서 목록에 올려놓는 바람에 중고시장에서 10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는 기현상까지 일어난 화제의 책이었다. 그런 해프닝에 힘입어 이번에 흐름을 수정하고 새로운 내용까지 추가해 개정판을 찍게 된 것이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 책이 부제에서도 알려주고 있듯이 '돈과 인간 그리고 은행의 역사'에 대해 전방위적인 통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서문에서 돈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역사적 자료들을 살피면서 '돈과 은행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철학과 역사 등 인류 문명사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여 발전해 온 금융 경제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켈란젤로가 조각하는 데 필요해 해부학을 공부했던 것처럼 역사의 맥을 짚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 얘기가 나온 김에 하는 소리지만 르네상스나 예술가 얘기가 나오면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개정판을 낸 출판사 이름과도 같다)을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해 유럽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가문이 메디치 아니었던가.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메디치가 그렇게 선량하고 긍정적인 사람들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황청의 공식 자금관리자였던 그들은 자식들을 왕족들과 결혼시켜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라섰고 나중엔 직접 교황을 세 명이나 배출하기까지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처럼 당대의 특급 예술가들을 고용해 조상들을 미화시키는 데 적극 활용했으며 식객이었던 마키아벨리를 시켜 코시모의 모든 결정과 행동을 미화시키는 『군주론』을 쓰게 했다. 피렌체를 유럽 최고의 예술 도시로 올려놓은 메디치 가문이 알고 보면 정경유착과 정략결혼, 음모와 협박 등으로 얼룩진 사람들이었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메디치 출신 교황의 사치와 면죄부 판매 때문이었다는 것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중세 이전부터 서양 세계는 모든 게 기독교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성경에서 대부업을 금지했기 때문에 돈거래는 늘 수면 밑에서 행해졌고 어디서나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은 대부업을 떠맡음으로써 혐오를 받았다. 서양에서는 대부업을 ‘돈이 돈을 낳는’ 화폐의 생식(生殖) 행위로 여기고 이는 창조주의 생명 창조를 모방하는 신성모독이라며 저주했던 것이다. 유대인의 대금업 때문에 신이 노해서 흑사병이 생겨났다고 할 정도였고 이런 비뚤어진 유대인 혐오 사상은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으로까지 유구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서양의 지배 세력들은 돈에 대해 언제나 이중적 입장을 취했고 십자군 전쟁에서 활동했던 템플 기사단도 진짜 직업은 대부업자들이었다.
겉으로는 돈을 멀리하는 척하면서 수면 밑으로는 종교와 왕권과 전쟁 등이 모두 돈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몰락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은행이 생겨났고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마침내 1587년 베니스에서 민간은행이 아닌, 지급결제만을 전문으로 하는 최초의 공공은행이 탄생했다.
저자 차현진은 역사에서 벌어진 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모두 나름의 맥락 속에서 업치락 뒤치락한 결과였음을 역사적 팩트들을 통해 설명한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좌판이나 테이블이라는 뜻으로 쓰였던 방카(Banca)라는 단어가 뱅크(Bank)로 이어진 것이나 부르쥬아라는 표현이 프랑스어 브르겐시스, 즉 상인에서 비롯된 것도 다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라는 것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나는 이 책 덕분에 한계효용의 법칙을 중요하게 여겼던 오스트리아 학파에서 시장주의나 자유무역주의가 생겨나고 그 이론이 변형된 신자유주의가 현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은광 요하임스 틸러가 변해 '달러'라는 미국 돈의 단위가 된 것도 처음 알았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알고 있던 상식은 샐러리맨의 어원이 소금을 월급으로 받던 로마 병사에서 유래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책을 통해 알게 된 경제사학적 지식보다 귀중한 것은 ‘돈의 가치라는 것도 결국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인문학적 통찰이다.
개정판에 새롭게 추가되었다는 독일의 문제적 은행원 햘마르 샤흐트가 등장하는 대목까지 읽고 나니 살짝 멀미가 일었다. 누가 읽어주는 이야기책에 빠져 흥미로운 경제사의 파도를 종횡무진 가르다가 겨우 육지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왜 책 제목에 '오디세이'가 들어갔는지 알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