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R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번 장에서는 의료정보학 도구의 꽃이라 할수 있는 Electronic Health Record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lectronic Health Record (EHR), 우리말로 전자의무기록은 병원에서 쓰는 다양한 IT시스템, 통칭 Clinical information system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스템입니다. 시대와 개발사에 따라 EHR의 범위와 역할이 다르지만 그 핵심은 환자정보, 즉 진단명, 처방, 수술 기록 등의 정보를 저장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컴퓨터에 매일 매초 연결된 시대에 그게 무슨 별 대단한 기능인가 하겠지만 의외로 병원에서 EHR을 쓰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10년전만 해도 병원 급에서의 EHR 도입율은 50%가 안되는 곳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 그 전에는 어떻게 환자정보를 저장하였는가 하면, 흔히 말하는 종이차트에 손으로 써서 복사하여 병원 지하실에 보관하였습니다. 일반인들은 아마 한번씩은 의사가 손으로 휘갈겨 쓴 차트나 처방전을 보면서 이걸 어떻게 읽는건지 의아해한 경험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손으로 쓴 처방으로부터 발생하는 잘못된 투약 등은 미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사회문제화 되어 왔었습니다.
미국의 경우 EHR의 전국적인 보급과 확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2009년 HITECH ACT (Health Information Technology for Economic and Clinical Health Act) 라는 법이 제정되면서부터입니다. 이를 주도한 정부기구가 국가건강정보기술조정국 (ONC, Office of National Coordination for Health Information Technology)이라는 곳이며 “연방정부의 의료 IT에 대한 2011-15년도의 전략 계획”을 기반으로 EHR의 전미 보급과 의료 정보 교환을 통한 의료 IT의 이익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HITECH법을 기반으로 EHR시스템을 병원 또는 의료인에게 인센티브와 페널티를 동시에 주며 사용하도록 장려하였는데, 이를 Meaningful Use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프로젝트의 이름이 참 의미심장한데, 왜 adoption, implementation 등이라고 하지 않고 “의미있는 활용”이라고 했을까요. 이는 시스템을 단순히 도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있게 활용, 즉 제대로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관점이 들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참 통찰력이 녹아있는 이름입니다.
Meaningful Use 프로젝트는 적격성이 인정된 헬스케어 종사자 및 병원이 인증된 EHR을 도입하고 활용하는 경우, 메디케어 (Medicare) / 메이케이드 (Medicaid) 인센티브를 지급함으로서 의료기관과 의사들의 참여를 유도하였습니다. 세부적으로는 3단계로 나눠 건강정보의 전자화, 표준화된 형식으로 파일화 (1단계, 2011), 확고한 건강 정보 교환 (2단계, 2014), 건강관리 결과 개선을 위한 품질, 안전 및 효율성 개선 (3단계, 2016)의 3단계 나눠져 실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2009년 기준으로 불과 12.2%의 병원이 Basic EHR 시스템을 운용한 반면 2015년에는 90% 이상이 Meaningful Use에서 검증된 수준의 EHR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EHR의 도입율이 이렇게 높아졌다는 것은 결국 병원에서 시스템을 사오던지 직접 만들던지 했다는 뜻이며, 이 기간동안 EHR 개발회사들이 폭풍성장하고 의료정보관련 IT 인력, 컨설턴트 수요도 급증합니다. 대표적으로 Epic과 Cerner는 EHR 업계의 투탑으로 올라섭니다.
Epic과 Cerner 두 라이벌 회사는 제품이나 조직문화 면에서 여러모로 대조되는 점이 많습니다. 우선 Epic은 상당히 폐쇄적인 회사로서 경력직 채용이 드물고 신입을 뽑아 Epic man으로 키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직원 복지는 매우 훌륭하고 특히 위스컨신 주 매디슨에 있는 Epic 본사 캠퍼스는 도저히 회사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테마파크처럼 꾸며놓았다고 합니다. 필자도 여태 못가봤는데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입니다. 또한 Epic은 모든 직원에게 개인 오피스나 공간을 주는 걸로도 유명한데, 이유는 자체 리서치를 해봤더니 그게 가장 생산성이 높더랍니다.
Epic은 오랫동안 업계에서 마켓 1위를 지켜왔으며 그런 영향인지 도입비용이 비싸고 커스터마이제이션 또는 시스템 통합을 잘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비싼 값을 한다고 시스템 자체는 가장 기능적으로나 사용성 면에서나 훌륭하며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도 Epic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은 애플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반면 Cerner는 오랫동안 마켓에서 2인자 자리에 있어 프로젝트를 유연하게 진행하는 경향이 있고 조직문화도 직원들이 나갔다들어갔다 자주 하는 편입니다. 시스템 아키텍처는 기본이 잘 갖춰진 편이지만 그놈의 유연성 때문인지 애플리케이션들의 종류는 많은데 하나하나가 마감이 깔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고갱님이 원하신다면 넣어야죠 Citrix 기반의 가상 데스크탑은 느리고 버벅거리는 경우가 잦아 안그래도 데이터 입력 많이 한다고 불만인 의사들의 위장병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Cerner의 조직문화는 IT기업치고는 꽤 경직된 편이며 그런점에서 GE Healthcare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Cerner의 조직문화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2001년 있었던 창업주이자 CEO인 (고) Neal Patterson의 이메일 사건입니다. Patterson은 잭 웰치와 비슷하게 독단적인 경영자로 알려져있는데 어느날 어지간히 화가 많이 났던 건지 매니저들을 상대로 전체메일을 돌립니다. 우리 사장님이 직원들한테 보낸 이메일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한문장 한문장 쫄깃쫄깃 스펙타클한 변태적인 재미가 있으니 밑의 전문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의 압권은 마지막의 Tick, tock입니다. 2주일의 기한동안 매니저들의 귓가에서 똑딱똑딱 소리가 들렸을 것이 눈에 선하네요. 하지만 이 이메일은 외부로 바로 유출되어 순식간에 뉴스거리가 되었고 Cerner의 주가는 이틀동안 25%나 폭락합니다. 경영진이 한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비즈니스 스쿨에서 케이스 스터디로 많이 삼는 사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저점매수가 목표였다면?
이렇게 외형적으로는 눈부신 발전을 한 EHR이지만 많은 문제점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EHR 도입 및 유지보수비용은 병원에게 큰 부담이며 이는 결국 의료비의 증가로까지 이어질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Meaningful use 프로젝트의 목표 중 하나는 헬스 IT를 활용한 중복의료행위의 제거 등을 통한 의료비 절감이었는데 그 핵심도구인 EHR이 의료비용면에서 부담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번째 문제는 EHR시스템이 지나치게 많은 기능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기능이 많으면 얼핏 보면 좋은 것 같지만 문제는 그걸 활용하면 할수록 Clinician들은 데이터를 입력하는데 시간을 써야 하며 의사들, 특히 일차진료의들은 그만큼의 시간을 고스란히 환자와 대면하지 못합니다. 또한 클리닉마다 의사마다 비슷한 환자 케이스를 볼때 다른 기능을 써서 EHR을 사용하는 일명 Variation 문제도 발생하는데, 이렇게 되면 저장된 환자 정보를 분석이나 리서치 등에 활용하기 매우 어려워집니다. 그럼 왜 EHR 벤더들은 그렇게 많은 기능을 구겨넣는가 하면, 그렇게 해야 제품의 기능이 많다고 홍보할수 있고 도입비용도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많은 범용 EHR 시스템은 마치 TV 리모컨처럼 일년내내 한번도 눌러볼 일 없는 버튼들로 가득합니다. 그와중에 또 커스터마이제이션까지 추가로 하면 그때는 뭐… 이것저것 간맞추려다 마지막엔 그냥 라면스프
EHR이 의료인들로부터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불만을 들은 것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지만 미국의사들의 경우 CMS compensation, meaningful use incentive, value-based care, pay for performance 등 수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서 필수적으로 입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결국 시스템의 사용성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는 것이 관건인데 딱히 묘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웹 기반의 유저 인터페이스의 향상에는 결국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음성인식 기반의 오더 및 데이터 입력이 더 각광받는 추세입니다.
많은 IT 시스템들이 그래왔듯 EHR도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쳐왔으며 앞으로도 그럴것입니다. 미래의 EHR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현재의 몇가지 방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EHR은 Inhouse 시스템에서 클라우드 기반으로 결국 옮겨가리게 되리라 보입니다. 사실상 Epic과 Cerner등의 메이저 벤더들은 패키지를 개별 병원에 인스톨하지 않고 자사의 데이터센터에서 가상 데스크탑으로 운영합니다. 어느 국가나 그렇듯이 의료분야는 보수적인지라 EHR을 병원 외부에 두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으며 환자정보 보호 등 법적 제도적인 면도 더 개선되어야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리라 보이는데 하드웨어 / 소프트웨어 양쪽 측면에서 클라우드 기반 시스템의 유지 보수 비용이 확연히 낮기 때문입니다. 돈앞에 장사없죠
2. IT 의 역사를 아시는 분은 아시는 얘기지만 IT 시스템 아키텍처의 메인스트림은 중앙집중 -> 분산형 -> 중앙집중 -> 분산형으로 돌고 도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재 EHR시스템은 외적으로 성장하면서 하나의 솔루션에서 모든 것을 제공하는 중앙집중, 백화점식 형태로 제공됨으로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전 챕터에서 언급한 상호운용성 기반으로 EHR 각 기능들의 모듈화가 이루어지게 되면 굳이 불필요하게 전체 시스템을 구매하지 않고도 필요한 만큼만 사서 조립하여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일수 있습니다. 또한 이 분야의 특성상 EHR은 단순히 의무기록의 저장 기능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청구시스템, R&D 시스템, 모바일, 정부의 보건복지 시스템, 모바일 등등과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병원이나 클리닉 단위가 아닌 비즈니스 유닛 단위의 시스템으로 재편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얼마전 Roche에 인수되어 유명해진 구글 벤처스 출신의 Flatiron Health는 Oncology에 특화된 토탈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3. 궁극적으로 EHR은 다른 IT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프로세스, 서비스 중심으로 완전히 재정의되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의료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지속가능한 수준의 비용으로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그 가치가 EHR에 투입된 비용에 대비하여 더 큰것인가의 여부가 EHR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되리라 봅니다. 이는 결국 프로세스 표준화와 계량화 등의 개념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 주제는 다음에 별도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Sinsky C, Colligan L, Li L, Prgomet M, Reynolds S, Goeders L, et al. Allocation of Physician Time in Ambulatory Practice: A Time and Motion Study in 4 Specialties. Ann Intern Med. 2016;165:753–7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