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는 내내 저는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신앙, 고통, 그리고 신의 침묵이라는 주제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 이 책은 교리를 넘어선 진짜 고민을 던졌습니다.
나는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정말 신이 함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침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의 여정을 따라가며 저는 그가 겪는 고통과 의심을 마치 제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의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제 자신을 비춰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성화를 밟는 장면에서 저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화를 신앙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성화를 믿음이라는 것으로 동치해 버린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했을까?
책의 제목인 '침묵'은 점점 더 깊고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이 침묵은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신이 침묵하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제게도 어려운 시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신의 침묵은 마치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로드리고가 고문당하는 신자들을 보며 무너지는 순간은 너무나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강한 신념을 가졌지만 점점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제 믿음이 그런 시험대에 오른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그런 의문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로드리고가 마지막에 성화를 밟는 장면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행위는 배교, 즉 믿음을 저버리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 순간 들려오는 예수의 목소리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신은 그 고통의 순간에도 함께하고 있었던 걸까요?
책을 읽고 한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게 정말 믿음의 끝인가?
아니면 믿음을 넘어선 무엇일까?
이 질문은 저를 괴롭히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안심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특히 기치지로라는 인물에게 마음이 갔습니다.
그는 여러 번 배교하고 다시 신에게 돌아오길 반복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비겁하고 약한 모습이었지만 그런 모습이 저와 닮아 있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 기치지로 같은 순간이 있지 않을까요?
때로는 의심하고 약해지고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다시 신을 찾는 모습이 말입니다.
기치지로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모습에서 인간의 본모습을 보았습니다.
나 역시 약하고 실수투성이지만 다시 돌아서서 신을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와 같지는 않을까?
기치지로는 그 점에서 아주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는 인물이었습니다.
엔도는 막부 시대 일본의 박해와 그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주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쉽게 신앙을 얘기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고 믿음 하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감수했는지 엔도는 그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엔도의 문체는 특별합니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딱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감정을 절제된 단어로 그려내면서도 독자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로드리고의 고뇌와 두려움 그리고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혼란은 마치 제 것이 된 듯했습니다.
로드리고가 느끼는 신의 침묵은 저도 종종 경험해왔던 것이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시기,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신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침묵은 정말 부재일까요, 아니면 더 깊은 무언가일까요?
로드리고가 고민하던 그 순간이 저의 그것과 겹쳐 보였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침묵'은 조금 다른 결을 가집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신의 존재와 고통에 대한 의문을 던집니다.
두 작품 모두 믿음의 시험을 이야기하지만 '침묵'은 고요 속에서 신의 존재를 찾으려는 인간의 절실함에 더 집중합니다.
제가 읽으며 느꼈던 감정은 신을 찾고 싶지만 그가 응답하지 않을 때의 그 막막함이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는 또 다른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카뮈는 인간의 부조리와 고독을 말하지만 엔도는 그 고독 속에서도 신이 함께할 수 있음을 은근히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신은 언제나 함께하는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출간 이후 '침묵'은 많은 사람들의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저 또한 여러 번 생각을 고쳐 먹으며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로드리고가 성화를 밟는 장면은 기독교 신앙의 전통적 관점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엔도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가장 강렬하게 전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단순히 외형적 충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 장면을 통해 신앙이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이해와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침묵'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고통 속에서 신앙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신이 정말로 침묵하는 것인지, 그 침묵이 무얼 뜻하는지 말입니다.
엔도는 신의 침묵이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 속에서 함께하시는 신의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제 신앙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도 신을 찾고, 이해하고, 붙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침묵'은 저에게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제 신앙의 깊이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