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밭이었다.
아무도 없는 여름의 들판.
어딘가의 바람은 자주 불었고, 흙냄새는 텁텁하게 달라붙었다.
그곳에 하느님이 떨어졌다.
진짜 하느님.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던 그분이 하늘에서 수박밭으로.
아무도 맞이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가 오시는 줄 몰랐다.
그 장면을 읽고 나는 책장을 덮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고, 그건 익숙하면서도 이상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분이 멀리 계셨으면 좋겠다고,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 같았다.
책을 다시 펼쳤다.
하느님은 비닐천막으로 향했다.
낡은 이불을 덮고, 기침을 하며, 도시의 소음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분의 옆에 누워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분은 위대하지 않았다.
일하러 다니고, 사람들의 거절을 받고, 쌀을 얻으러 가는 길에 발이 미끄러지기도 했다.
웃기기도 했고, 좀 창피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이상하게... 그분을 더 믿게 됐다.
신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사람 곁에 있었다면, 그게 훨씬 더 설득력 있었던 것이다.
신이 하늘에 있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신이 비닐천막에 있는 건, 이상하게도...
더 받아들여졌다.
공주는 고아였다.
어른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이에게 그런 이름이 붙는 건 어쩌면 세상의 유일한 아이러니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이름값처럼 고귀하지 않았고, 늘 배가 고팠고, 잠잘 때마다 등을 구부리고 자야 했고, 말보다 눈으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런 공주와 하느님이 함께 산다.
예수님도 같이 살았다.
방은 좁았고, 난방은 잘 되지 않았고, 하느님은 자주 감기에 걸렸다.
예수님은 채소를 팔러 다녔고 가끔은 장사도 잘 안 됐다.
누군가를 구원하기는커녕 그분들 자신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 장면들을 따라가며 내가 익숙했던 하느님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다.
말씀하지 않는 신, 강요하지 않는 신, 그저 곁에 있는 신.
그리고...
그게 믿음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믿는다는 건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감동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었다.
할머니가 있었다.
과천댁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북 출신의 노인.
한 해가 지날수록 어깨는 더 구부러졌고 눈은 더 자주 흐릿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해마다 설이면 상을 차렸다.
오지 않는 가족을 위해.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을 위해.
하느님은 그 상에 앉았다.
말없이 송편을 빚고 전 부치는 할머니 옆에 앉아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그게 전부였다.
위로는 없었고 설교는 더더욱 없었다.
나는 그 장면이 가장 좋았다.
그분은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는 걸 우리는 왜 자주 잊고 사는 걸까.
봉식이는 불에 타 죽었다.
혼자 있었다.
집에 어른은 없었고 이웃도 없었다.
화재는 생각보다 빠르게 번졌고 연기는 말보다 더 앞서 손을 잡았다.
하느님은 그것을 지켜봤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은 봉식이의 부모와 함께 화장터까지 갔다.
나는 이 장면 앞에서 멈췄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을까.
왜 지켜만 보셨을까.
나는 속으로 소리쳤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순간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신은 구원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아파했다.
그리고 그게 구원보다 더 깊은 신의 얼굴 같았다.
거리에 소리가 흘렀다.
확성기에서 나온 외침.
“예수님이 곧 오십니다! 심판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그 말을 들었다.
예수님도 들었다.
두 분은 나들이 중이었고, 리어카를 밀고 있었고, 채소는 잘 팔리지 않았고, 하느님은 방금 군고구마를 드셨다.
그들은 그 사람들 옆을 그냥 지나갔다.
아무도 그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곧 오십니다”라고 외치던 사람은 이미 옆에 오신 그분을 보지 못했다.
그 장면은 우습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차가웠다.
현실과 너무 닮아 있어서 웃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멈췄다.
그건 누군가를 비난하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건 우리 모두가 비껴가는 장면이었다.
그분은 이미 와 계셨다.
하지만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나도.
내가 예배에서 외치는 이름, 기도 중에 부르는 이름, 그 이름을 가진 분이 내 옆에 왔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렸던 적이 있었다.
기다린다고 하면서, 정작 도착하면 반기지 못했던 순간들.
그 책은 내 종교를 풍자하지 않았다.
다만, 내 시선을 바꿨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믿어온 신은 말씀이 많았다.
설교가 길었고, 판단이 빨랐고, 대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책 속의 신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고치지도 않았고,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았다.
대신, 같이 살았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밥을 먹었다.
그분은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냥 사랑처럼 굴었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글쓴이는 권정생이었다.
어린이 책을 쓰던 작가.
흙집에 살았고, 병약했고, 아주 오래 혼자였다.
그 사람은 강하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문장은 조용히 사람을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을 파고들었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를 쓴 사람.
작고 더러운 존재에게서 의미를 본 사람.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산다]를 쓴 사람.
이야기 속의 신은 권정생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조금 닮았다.
말없이 걷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을 몰랐지만 이제는 조금... 아는 것 같다.
그의 문장은 하느님처럼 조용했고 예수님처럼 다정했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은 무대에 서 있는 신이었다.
빛을 받았고, 찬양을 받았고, 기도를 통해 호출되었다.
하지만 이 책의 신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커튼 뒤로 사라졌고 뒤편 골목으로 향했다.
거기서 수박을 먹고, 군고구마를 나누고, 리어카를 끌고, 누군가의 죽음을 따라갔다.
그분은 계속 무대 뒤에 계셨다.
조명이 꺼진 곳에서.
그리고 그게 믿음이었다.
책의 끝에 이르렀을 때 나는 문득 이런 질문을 했다.
“그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을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 장면을 쓰지 않았다.
예수님도 떠나지 않았고 하느님도 어디론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거기에 있었다.
과천댁의 방에, 달동네의 좁은 골목 안에, 시장 바닥의 어귀에.
누군가를 떠난다는 말은 소중했기에 가능한 표현이었지만 이야기 속의 신은 떠남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냥 남아 있었다.
하루를 살아가고, 저녁에 불을 끄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일어나는 삶.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삶.
그 안에 있었다.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 신.
나는 처음으로 그런 신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질문 속에 있다.
하느님이 지금 내 옆집에 산다면 나는 알아볼 수 있을까.
이름을 물어볼 수 있을까.
초인종을 눌렀을 때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는 오랫동안 그분을 믿는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그분이 실제로 오신다면 나는...
못 알아볼 것 같다.
기도문은 외웠지만 기도처럼 말하지 않았고 찬양은 불렀지만 사랑처럼 살지 않았다.
그분은 너무 일상적인 얼굴을 하고 올 텐데 나는 너무 종교적인 눈으로만 그분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책 속 하느님은 성경을 인용하지 않았다.
말씀을 외치지 않았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고구마를 나눠주었고, 고양이를 쓰다듬었고, 아이를 안아주었고, 슬퍼하는 사람의 옆에 앉았다.
아무 말 없이.
아무 해석 없이.
그것이 신이었다.
그것이 믿음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분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분은 종교 속에만 계시지 않는다는 걸.
그분은 성전이 아니라 삶 속에 거하신다는 걸.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누군가의 옆집에서 조용히 살고 계실지 모른다.
책장을 덮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지도 않고, 그냥... 그 장면들을 다시 떠올렸다.
수박밭의 여름.
리어카의 소리.
봉식이의 방.
과천댁의 설음.
공주의 손.
군고구마의 김.
그 속에 있는
그분의 얼굴.
나는 문득 이제라도 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벨을 누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앞에 서 계실 것이다.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열어줄 때까지 그분이 떠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