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야드의 기원과 신학
빈야드(Vineyard)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름이 아니다.
1970년대 미국 서부의 공기, 특히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갱신과 ‘예수 운동’의 여진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세웠다.
출발점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켄 걸리크슨(Kenn Gulliksen)이다.
그는 1974년 웨스트 LA에서 작은 모임을 시작했고 이 모임은 1975년 베벌리힐스 여성클럽에 여러 그룹이 모이는 형태로 확장되었다.
'빈야드'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지역 교회들 사이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이야기할 때 연도를 하나로 못 박아 말하기보다 1974–75년을 ‘태동기’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었다.
성경을 중심에 놓고 사람들의 실제 삶과 예배를 가깝게 하려는 시도, 과장보다 정직한 말과 노래를 택하려는 태도가 초기에 이미 드러나 있었다.
여기에 존 윔버(John Wimber)라는 이름이 들어오면 내러티브가 선명해진다.
그는 젊은 시절 음악계에서 일했고 회심 후에는 퀘이커 전통에서 안수를 받아 목회자가 되었다.
단순 경력 소개를 넘어 중요한 지점은 그가 교회 성장과 선교학, 그리고 성령의 은사 문제를 이론과 현장의 언어로 동시에 다뤘다는 사실이다.
풀러 신학교 주변에서 이루어진 연구와 과목—특히 나중에 유명해진 한 과목—가 그의 생각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그 과목은 흔히 MC510으로 불린다.
정확히 적으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사인즈·원더스(표적·기사)와 교회 성장’을 다루는 강의가 열렸고, 1986년에는 학교 결정으로 중지되었다.
“기적을 가르쳤다”는 식의 오해가 과목의 핵심을 가리기도 하지만 실제 초점은 하나님 나라의 선교가 오늘의 현장 안에서 어떻게 증거될 수 있는가였고 그 과정에서 성령의 은사가 어떤 질서 안에서 유익을 낳을 수 있는가를 탐구한 데 있었다.
윔버가 남긴 사유의 골격을 짧은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시간감각은 단정이 아니라 태도를 만든다.
'이미'에 기대어 지금도 하나님이 위로하고 치유하고 인도하신다는 소망을 품되, '아직'의 세계가 품은 한계를 보며 겸손과 질서를 배운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은사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사랑과 분별을 원칙 삼았다.
방언, 예언, 치유 같은 은사를 특정한 ‘영적 엘리트’의 전유물로 만들지 않았다.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가 주어질 수 있으며 그것은 공동체를 세우는 데 쓰일 때 의미가 있다.
흔히 오해되는 대목 하나를 분명히 해 두면 빈야드는 방언을 성령세례의 ‘필수 증거’로 가르치지 않는다.
방언은 은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예배에서는 성경이 제시한 질서(특히 고린도전서 14장의 원칙)를 기준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 신학적 골격은 곧 예배의 언어를 바꿨다.
빈야드가 예배에서 즐겨 사용한 기도문 가운데 하나가 “성령이여 오소서(Come, Holy Spirit)”다.
이 문장은 빈야드가 만들어 낸 표어가 아니라 초대 교회와 전례 전통에서 길게 흘러온 요청을 현대 예배의 중심으로 끌어온 것이다.
강한 선포나 격한 연출 없이도 이 간단한 초대만으로 예배의 방은 열린다는 확신이 있었다.
초청은 곧 기다림을 낳고, 기다림은 군더더기 없는 언어와 절제를 부른다.
이 절제가 바로 빈야드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의 핵심이다.
자연스러움은 감정이 없는 차가움이 아니다.
꾸미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책임 있게 응답하려는 태도다.
역사적 전환점으로서 1982년은 따로 표시해 두는 것이 좋다.
윔버가 담임하던 교회는 그 무렵 애너하임 빈야드(Anaheim Vineyard)로 이름을 바꾸고, 앞서 언급한 걸리크슨이 사용하던 ‘빈야드’ 이름 아래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빈야드는 지역 교회들의 느슨한 연합체로서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다.
중심 인물이 누구였는지를 넘어, 핵심 가치 문장이 공유되며 확산되는 방식이 특징이었다.
성경을 중심에 놓고, 성령의 은사를 사랑하되 질서 아래 두고, 회중의 참여를 넓히고, 과장 대신 정직을 택하는 태도.
이런 문장들은 당시 남가주 전체에 퍼져 있던 예배 문화의 고민과 정확히 맞물렸다.
젊은 세대는 복잡한 형식보다 진정성을 원했고 교회는 그 갈망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따라올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야 했다.
예배의 언어가 바뀌면 음악의 선택도 달라진다.
빈야드는 하나님께 직접 말 건네는 2인칭 가사를 즐겨 사용했다.
“그분은 선하시다”라는 설명보다 “주님, 선하십니다”라는 직접 고백이 회중의 입술을 빨리 연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멜로디와 키, 곡 길이에도 영향을 주었다.
음역은 높지 않게, 후렴은 간결하게, 반복은 적당히.
음악을 잘 모르는 이도 두세 번이면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음악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무대의 완벽함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참여를 돕는 것.
따라서 편성도 사람의 목소리를 가리지 않도록 맞춰졌다.
드럼과 베이스는 리듬의 바닥을 만들고 기타와 건반은 여백을 남겼다.
소리를 채우는 기술보다 비워 주는 기술이 예배에는 더 유익할 때가 많다.
역사만큼이나 오해가 많은 대목이 예언과 방언이다.
빈야드는 예언을 미래 맞추기로 보지 않는다.
성경적 의미에서 예언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위로·격려·권면에 가깝다.
그래서 공예배에서의 예언은 대개 짧고 분명한 문장으로 등장한다.
기존 곡 위에 한두 줄 정도가 덧붙고 이 문장은 곧바로 공동 고백으로 회수된다.
특정 개인의 비밀을 폭로하거나, 사적인 지시를 강요하는 형태는 허용되지 않는다.
다룰 일이 생기면 예배 후에 책임 있는 인도자와 조용히 판단한다.
방언에 대해서도 원칙은 간단하다.
개인의 작은 기도로 낮은 소리의 방언 찬양은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회중 전체가 들을 만큼 큰 소리의 방언 메시지는 통역과 분별이 전제될 때에만 공예배에서 자리를 얻는다.
이 원칙은 고린도전서 14장의 질서를 현대 예배에 적용한 것에 가깝다.
요지는 한 줄로 말할 수 있다.
은사는 유익과 사랑과 질서 아래 있을 때 오래 산다.
1980년대 중반, 풀러의 강의가 중지된 일은 종종 과장되게 회자된다.
사실관계 자체는 간단하다.
강의는 1982–85년에 운영되었고, 1986년에 중지되었다.
공론장에서 더 치열한 토론이 필요했던 주제를 교실에서 다뤘기 때문에 논쟁이 커졌고 학교는 학사 운영 차원에서 결정을 내렸다.
강의의 중지가 빈야드의 신학을 ‘퇴출’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기 이후로 빈야드는 현장 중심의 자정과 분별을 더 강조하게 된다.
동일한 원칙—성경, 사랑, 질서, 유익—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예배에서 무질서로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공적으로 다루는 기준을 만들었다.
그 기준은 이후 빈야드가 겪는 논쟁—특히 특정 지역 집회에서 발생한 과도한 현상들—을 처리할 때 중요한 기준선이 된다.
빈야드의 이름이 예배 음악과 깊게 엮이는 것도 이즈음이다.
초창기에는 Mercy Records(1985)와 같은 이름으로 음반을 낸 뒤, 점차 Vineyard Music(오늘의 Vineyard Worship)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인다.
이 레이블들이 남긴 중요한 유산은 화려한 스튜디오 사운드가 아니라 예배 현장의 호흡을 살리려는 태도다.
박수 소리, 숨 고르는 소리, 여백의 공기까지 가능한 범위에서 남겼다.
완벽히 다듬어진 한 장면 대신 사람의 목소리가 앞으로 나오는 장면을 보존했다.
이것이 빈야드가 음악 제작에서 선택한 윤리였다.
곡들이 오래 남은 이유는 음향의 유행 때문이 아니라 회중이 주인공인 사운드가 교회에서 오래 작동하기 때문이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권에서는 1998년경 ‘Vineyard Music UK’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Vineyard Records UK로 이어지며 여러 대표 곡을 탄생시켰다.
브라이언 도르크슨의 〈Come, Now Is The Time To Worship〉(1998), 캐서린 스콧의 〈Hungry〉(1999) 같은 곡들은 “현재의 언어로 하나님께 직접 말 건네기”를 전 세계 회중이 함께 배우게 만든 실례다.
미국 서부의 현장에서도 마리 바넷(Marie Barnett)의 〈Breathe〉가 1995년 미션 비에호 빈야드 예배 중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즉흥 고백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바로 그 직전, 회중은 윔버의 〈Isn’t He?〉(1980)를 부르고 있었다.
즉흥은 장식이 아니라 그날의 고백을 오늘의 말로 옮기는 짧은 다리였고 그 다리는 길지 않아도 충분했다.
논쟁의 장면들도 빈야드의 기록에서 빼놓을 수 없다.
캔자스시티의 ‘예언자’들과의 관계 정리(1990년대 초반)나,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에서 1995년 12월 빈야드 연합과의 공식 결별로 이어진 사건은 모두 공예배의 질서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내린 판단의 결과였다.
빈야드는 현상의 강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과 분별 가능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회중 전체가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돕는 자리에서 개인의 체험이 공적 흐름을 압도할 때 빈야드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이는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현상이 목적이 되지 않도록 지키려는 태도였다.
그 선택은 호불호를 불렀지만 적어도 일관된 기준을 확인해 주었다.
지금의 빈야드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라면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성경 중심의 고백, 성령의 현재적 도우심에 대한 절제된 기대, 회중이 주인공인 찬양, 사랑과 질서를 우선하는 은사 사용.
이 네 줄의 문장 때문에 빈야드는 특정 교단의 내부 경계선을 넘어 다양한 교회들에 예배의 언어를 남겼다.
“주님, 선하십니다”라는 2인칭 고백,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낮은 음역과 짧은 후렴, 곡과 곡 사이에 설명 대신 여백을 두는 습관, 설교 전후에 조용하고 안전한 기도 시간을 마련하는 감각.
이름은 달라도, 이 언어와 습관은 여러 대륙에서 공유되고 있다.
빈야드의 초상은 유행이 아니라 원칙에서 그렸다.
그래서 오래간다.
원칙이란 결국 질문의 형태로 남는다.
지금의 선택이 사람을 세우는가.
성경과 사랑에 충실한가.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가.
분별과 책임이 가능한가.
이 질문들이 살아 있는 한, 빈야드가 초기에 선택한 길—정직한 말, 과장 없는 기대, 회중의 참여—은 낡지 않는다.
1974–75년의 태동과 1982년의 구조화, 1986년의 강의 중지 이후에도 그 길은 유효했다.
오늘의 예배실에서 같은 질문이 다시 묻히고 같은 대답이 다시 노래가 된다.
그렇게 역사와 신학은 찬양의 형태로 회복된다.
빈야드의 ‘기원’은 결국 하나님께 직접 말 거는 법을 잊지 않으려는 교회의 작은 결심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결심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