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2년 영화 이키루는 한 평범한 중년 공무원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진정으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와타나베 씨는 도쿄 시청에서 30년 넘게 근무해 온 사람인데요.
그의 하루는 거의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집에서도 늘 무기력하게 지내고 자식과의 관계도 멀어지면서 그에게는 가족도 일도 모두 흥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죠.
그런데 어느 날 의사에게서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위암 말기라는 진단이었죠.
남은 시간은 고작 몇 개월.
이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와타나베 씨는 그동안 아무것도 아닌 듯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처음으로 ‘내가 진짜 살아온 게 맞나’라는 질문을 하게 되죠.
그동안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데만 익숙했지 정작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와타나베 씨는 처음에 술집을 찾으며 일탈을 시도해 봐요.
평소에는 가지 않던 곳에서 술에 취해보기도 하고, 이상한 소설가와 만나 "도대체 인생은 왜 이렇게 허무한 거야"라는 이야기를 나누죠.
그리고 그저 일탈적인 경험을 하면서 뭔가 해소될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어요.
잠깐은 재미있었지만 끝내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
그즈음에 그는 우연히 과거 직장 동료였던 도요라는 젊은 여성을 만나게 돼요.
도요는 밝고 생기 넘치는 사람으로 늘 활기차고 즐겁게 일을 합니다.
와타나베 씨는 도요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과 너무 다른 그녀의 에너지를 느끼죠.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이렇게 즐거울까? 어떻게 저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거지?”
그의 마음속에서는 작지만 강렬한 질문들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해요.
이 만남이 와타나베 씨의 삶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죠.
그제야 그는 자신도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목표를 세웁니다.
바로 버려진 땅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드는 것.
시청 안에서 모든 것이 서류와 절차로만 처리되고 누구도 정말 시민을 위해 무엇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 그 환경 속에서 와타나베 씨는 혼자서라도 꼭 이 놀이터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이 일은 그의 마지막 목표이자 꿈이 됩니다.
사람들이나 상사들은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이제 와타나베 씨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었어요.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진짜로 가치 있다고 믿는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와타나베 씨가 세상을 떠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장례식에서 동료 공무원들이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죠.
평소에는 다들 와타나베 씨를 무시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장례식에서 그들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놀이터 프로젝트에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게 되죠.
처음에는 다들 와타나베가 만든 놀이터가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진심 어린 노력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그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동료들은 그가 작은 변화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되새기면서 묘한 감동을 받습니다.
이키루는 단순히 한 사람이 새로운 일을 하게 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 영화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깊은 예술적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관료주의와 개인의 소외라는 주제를 신랄하게 비판해요.
영화에서 와타나베 씨가 매일매일 문서 더미에 파묻혀 살아가는 장면이나 그가 제안한 프로젝트가 회의에서 여러 번 거부당하는 모습은 현대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죠.
또한 영화에는 구로사와 감독만의 특별한 기법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영화는 두 가지 시간의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첫 번째는 와타나베 씨가 암 선고를 받은 후의 방황과 변화의 과정을 그리고 있고, 두 번째는 그의 장례식 장면을 통해 그의 동료들이 그의 삶을 돌아보는 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시간 흐름을 통해 관객은 와타나베 씨의 여정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는 거죠.
영화 속 장면 연출도 정말 인상적입니다.
와타나베 씨가 병원에서 위암 선고를 받은 후 길을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배경 음악이 완전히 사라져요.
마치 무성영화처럼 고요한 순간 속에서 와타나베 씨가 혼자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장면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도요와 카페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지는데 이 노래는 마치 그의 새로운 삶을 축하해 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요.
사운드와 침묵을 이렇게 독특하게 활용해서 관객들이 그의 감정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한 거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내리는 공원에서 와타나베 씨가 그네를 타며 부르는 노래는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슬퍼요.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을 때, 사랑이 식기 전에.”라는 가사를 담고 있는데 이 노래는 마치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진정한 삶을 되찾으려 했던 여정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와타나베는 비록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거죠.
이 영화는 단순히 한 사람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드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어요.
구로사와 감독은 와타나베 씨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나요?"
그 질문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와타나베는 남은 시간 동안 놀이터를 만들면서 자신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 이 공원이라는 걸 깨닫게 되죠.
큰 업적이나 재물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거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는 시간과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감동을 주는 영화로 남아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겁니다.
"나는 진짜로 내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정말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