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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해 보이는 시라오레의 따뜻한 맛

고슈엔 - 시라오레, 카츠라

by 미듐레어

일본차를 접하면서 가장 띠용했던 차가 뭐였냐면 쿠기차라고도 부르는 보차였다. 여의봉 할 때 봉자를 써서 봉차, 일본식 발음으로 보차인데 찻잎이 달려있는 목질화되지 않은 연한 줄기 부분을 모아서 만든 차라서 봉들로 만든 차, 보차이다. 이것을 쿠기차라고도 부르는데 물론 원래 차로 마시는 부분이고 블랜딩을 할 땐 일부러 비율을 좀 늘려서 맛을 내기도 하는 부분이지만 이걸 모아서 따로 차로 만들 줄이야. 찻잎이 아닌 차나무 가지로 만든 차라고 하니 당연히 띠용스러울 수밖에. 아무튼 쿠기차에 대한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실전은 다른 것이 보차를 부르는 다른 이름들도 꽤 있다는 것. 이를테면 오늘 이야기할 시라오레 같은 경우이다. 시라오레 역시 보차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백 뭐라고 써있길래 나는 당연히 아래 그림에 있는 복숭아를 보면서 복숭아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마침 그 지역 특산물이 복숭아라고 하니 그저 아 모모타로의 고장 남다르군, 하면서 말차가 들어간 복숭아 녹차 이런 건 줄 알았다. 구입 전에 좀 꼼꼼하게 알아보고 구입할걸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알았어도 사 왔을 거긴 해서.. 말차가 들어간 시라오레, 카츠라. 마트에서 사 왔고 130g이라는 넉넉한 용량에 가격은 600엔. 굿.

일본어를 좀 배우던지 했어야

오카야마에서 고베, 교토가 그리 먼 지역이 아니다 보니 교토 쪽에서 차를 만들고 남는 대들을 모아서 만드는 시라오레인가보다. 카츠라가 무슨 뜻인가 했더니 계수나무 계자를 카츠라라고 하는 듯. 하지만 설명에는 별 다른 계수나무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섬세한 향의 여성스러운 차라고만 되어있다. 그게.. 뭐야.. 가리가네, 그러니까 보차의 재료가 되는 줄기들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에 고급 말차의 부드러운 향을 더했다는데 그게 왜 여성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뭐 맛있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야심차게 개봉. 그냥 부와악 뜯었다가는 봉투가 찢어져서 보관이 어려울까 봐 가위로 조심조심 개봉했다.

가루가 많이 묻어난다

일단 향은 그냥 센차의 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더 파우더리 한 느낌이긴 한데 아무래도 말차를 첨가해서 그런 듯. 말차가 아니고 말차향 인공첨가물의 느낌에 더 가까운데 그렇다고 인공향 위주, 그러니까 가향이냐고 물어본다면 또 그쪽은 아니다. 아무튼 쿠기차라고 하면 이거보단 조금 더 풀내가 나고 살짝 구수한 느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 좀 많이 센차느낌이 강하다. 건엽을 덜어보니 어라, 차엽이 생각보다 함량이 높은 느낌이다. 이 정도면 일반 센차에 줄기를 좀 많이 넣은 블랜딩 느낌이지 않나 싶은데 조금은 의외의 모습. 역시나 향은 말차 뉘앙스를 빼면 빤질한 느낌은 없어도 센차 쪽에 가깝지 않나 생각이 든다.

지역명물 무라스즈메와 함께

5g의 차를 70도로 식힌 물 90ml로 30초 안되게 우렸다. 말차가 녹아서인지 수색은 아주 맑은 편은 아니었으나 거름망이 막히거나 하는 일은 없이 시원하게 걸러진다. 격불 한 말차처럼 크리미 한 향이 나지는 않지만 그냥 물에 녹인 말차의 씁쓸한 풀내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녹차의 향이 난다. 줄기 부분이 많은 차인만큼 아미노산이 진한 교쿠로 같은 육수맛이 날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의외로 향이 꽤나 진한 육수느낌이다. 한 모금 마셔보니 정말 꽤나 진한 육수느낌이 있다. 아미노산이 많아 육수처럼 느껴지는 경우 진한 감칠맛이 짭짤함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차의 경우가 딱 그렇다. 감칠맛과 짭쪼름함이 오차즈케 느낌이 물씬 난다. 실제로 나눔을 받으신 분들 중 대전 문선생님께선 연어구이 올려서 오차즈케를 바로 해서 드셨다. 뭔가 마트에서 사 온 대용량 녹차가 정확히 갈 곳을 찾은 느낌이랄까. 다만 줄기 부분이라 그런지 내포성 뭐 그런 건 정말 없고 두 번 딱 마시면 더 이상 말차의 기운도 없고 차맛도 거의 없는 맹탕이 되어버린다. 줄기가 많으면 좀 구수하고 부드러운 차가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의외로 진한맛이라 말차가 많이 들어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말차를 넣는다고 이렇게까지 잎차스러워지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신기하네.

나물무침

엽저를 보니 확실히 줄기차가 맞긴 하다. 줄기가 많았지만 잎차 같았던 시라오레 카츠라. 맛있게 잘 먹고 여기저기 나눠주기도 하고 풍성했던 차로 기억될 것 같다. 솔직히 오늘은 봉차를 보니 봉기 뭐 이런 단어밖에 생각이 안 나고 억지로 오대라는 단어를 떠올려도 대나무 죽창밖에 생각이 안 난다. 이렇게 시라오레도 채엽된 모든 부분이 다 차라는 교훈을 주는데, 왜 부당한 레이블링에 아무 저항과 거부 없이 순응할 것을 요구하는지. 왜 부당한 시스템에 동조하고 부역하는지. 왜 혐오와 차별에 부역하는 편을 먼저 들어주는지. 정말 나뭇가지만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12월 21일 동지의 가장 길고 추운 밤, 집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이 죄스럽고 내가 아닌 남쪽 고개에서 찬바람에 떨고 계신 분들이 마셔야 할 것만 같았다. 다음날인 오늘까지도 안절부절못하다가 마침내 한강진의 축제를 목격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시라오레에 말아먹을 밥도, 내 권리의 일부도, 모두 그분들 덕에 유지되고 있다. 소박해 보이는 시라오레의 맛이 새삼 감사한 날이다. 시라오레 카츠라,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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