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num & Mason - Victoria Grey
포트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뭐가 있을까. 뭔가 고급지고 로얄로얄한 그랜드 뭐시기의 이미지? 어쨌든 영국왕실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포트넘인 만큼 왕실의 인물들을 가져다가 주제로 삼은 블랜딩이 꽤나 있다. 오늘 마실 빅토리아 그레이도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에서 따온 블랜딩인 만큼 로-얄한 이미지의 차가 되겠다. 왜 하필 빅토리아 여왕과 얼그레이일까. 그야 물론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에서 본격적인 홍차 문화가 발달하기도 했고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차를 팍팍 날라다 주기 시작한 시기이고 얼그레이의 유행이 바로 그러한 배경에 힘입어 시작되었으니 얼그레이와 빅토리아 여왕을 엮어서 차를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다. 빅토리아 그레이도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출시된 나름 젊은 차로 오며 가며 구경만 하다가 지난봄 여행에서 들른 포트넘 매장에 있길래 구매했다. 사실 250g 틴만 있어서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면세가 6200엔이어서 조금 더 식겁하고 있다가 왠지 이번에 구매하지 않으면 다음도 없을 것 같아 구매. 그날 살짝 정신이 나가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쇼핑을 하긴 했다. 다행히 상미기간은 아주 넉넉했어서 소진 부담은 덜한 것 같다.
빅토리아 그레이는 역시나 얼그레이의 변주로 기본적인 베르가못 가향의 차인데 가장 큰 특징은 꿀향을 입혔다는 것. 솔스베리 평원의 꿀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야생화와 클로버가 풍부한 지역이라 은은한 야생화의 향이 도는 강하지 않은 꿀이라고 한다. 꿀 들어가는 블랜딩을 그동안 이것저것 마셔봤는데 대부분 꿀을 빙자한 설탕이었던 것 같고 진짜 꿀을 블랜딩 하면 꿀의 향이 블랜딩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어느 꿀인지 좀 찾아보게 되었다. 그 외에도 사람들이 많이 언급했던 게 라벤더였는데 보통은 라벤더향에 달달한 꿀이 들어있는 차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더라. 약간의 스포일러를 미리 풀자면 라벤더 향은 거의 나지 않고 꿀, 감초, 베르가못의 순서로 주된 향이 자리 잡고 라벤더와 콘플라워는 오히려 차를 좀 순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에 가깝지 않나 싶다.
틴을 열자 살짝 단향과 함께 베르가못향이 코를 친다. 다시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베르가못과 함께 연한 꽃향에 나무향 같은 단내가 섞여있다. 특이한 걸로는 그레이류에서 두세 손가락 안에 들겠다. 좋은 쪽이니 특별하다고 해야 오해가 없겠군. 찻잎을 덜어내 보니 커다란 감초뿌리가 한약방에서 작두로 자른 듯 숭덩숭덩 잘려서 들어있다. 나무토막 들어있는 것 같네. 그 옆으로 파란 콘플라워들과 노란 쌀겨 같은 라벤더가 잔뜩 들었다. 라벤더가 어디 있나 한참 봤는데 아직 꽃이 터지기 전인건지 안쪽으로 보랏빛의 파란 라벤더색이 있긴 했다. 그 뒤로는 홍차들이 보이는데 흔한 브로큰의 중국과 스리랑카 차들이다. 빅토리아 시대인데 인도가 아니라니 조금 아이러니. 지금 생각하니 아쌈 다즐링으로 교체하면 모든 게 살짝 따로 놀지 싶기도 하다.
늘 우리던대로 6g의 차를 30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린다. 꿀향이 넘실거리는 찻잔이다. 꿀향과 함께 은은하게 감초향이 떠도는데 고급 나무욕조에서나 날법한 아주아주 은은한 젖은 나무향과 달달한 향이 섞여있는 순한 느낌의 향이 지속된다. 그렇다고 희멀텅한 느낌은 아니고 아주 은은하게 발산하는 느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한 모금 마셔보면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이 가장 먼저 느껴지고 그 뒤로 무게감 있지만 온화한 얼그레이가 조심스럽게 지나간다. 흑설탕 같은 단맛이 아닌 차분한 꿀향과 옅은 나무향의 감초향이 생소할 수 있어서 새로운 허들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얼그레이가 너무 향수 같고 비누맛이 나서 싫다는 사람들에게 원래 얼그레이가 어때야 하는지, 베르가못을 제대로 사용한 예로 보여주기에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된다. 제발 시중에 돌아다니는 얼그레이향 파우더를 잔뜩 녹여서 만든 물건들을 얼그레이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과서적인 얼그레이를 품고 있긴 한데 정말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홍차이기도 한 것이 꿀과 감초의 기운은 온기와 함께 지속되는 듯 식을수록 베르가못의 향이 점점 날을 세우면서 수렴성이 강해지다가 종내에는 강한 베르가못의 떫은 차가 되어버리고 만다. 식을수록 차가 무거워진다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 너무 정직하게 관통하는 차. 이것은 내가 차를 진하게 우린 탓도 있겠는데 연하게 우려 보니 별 특징 없는 얼그레이였다가 평범한 얼그레이로 돌아오는 걸 보면 원래 특징이 그러한가 보다 싶다. 그러므로 보온이 상당히 중요한 차 되겠다. 물론 빨리 마셔버리는 것도 방법. 또 다른 방법은 앞쪽은 스트레이트 뒷쪽은 우유를 부어 밀크티로 마셔주는 방법도 있겠다. 그러고 보면 우유를 부을 것도 없이 처음부터 생크림등과 함께 스콘을 곁들여 크림티로 마신다거나 과일이 많이 들어간 생크림 케익등을 매치하는 것도 좋았다. 정작 사진은 쿠키와 찍어놨네. 꿀맛이 나는 차라서 성심당 무화과 시루와 함께 먹었을 때 궁합이 정말 딱 좋긴 했었다. 허니가 들어간 블랜딩이 무화과랑 잘 맞았고 시루에 들어간 생크림들이 진한 차와 또 딱 맞아서 시너지가 아주 좋았다.
밀크티는 역시나 아주 훌륭했다. 다만 가격대를 생각하면 만족할 만큼 차를 팍팍 쓰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러니까 10g에 248엔인데 14g 좀 넘게 사용해서 300ml, 100도 물에 3분쯤 우리고 200ml 우유를 부어서 마셨으니까 밀크티 500ml에 찻잎이 약 350엔이라 생각하면 이미 어지간한 카페에서 사 먹는 가격이 나와버렸다. 자주는 못해먹어도 밀크티로 마시면 정말 재미있는 게 뭐, 빅토리아 그레이는 우유맛을 이겨. 보통은 우유맛이 베이스가 되고 거기에 홍차맛이 얼마나 녹아있는지, 그리고 그 맛의 합을 뚫고 얼마나 향이 전달이 되는지가 밀크티의 관건인데 빅토리아 그레이의 경우엔 이 진한차의 수렴성이 싹 가실정도로 우유를 부어줬음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이트와 동일한 맛과 향이 난다. 정확히 물맛만 우유맛으로 대체가 되고 딱 끝나버린다. 우유향조차도 그다지 기를 펴지 못하다 보니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구분 못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빅토리아 여왕님의 대영제국 파워인가. 역시 기개가 남다르다.
빅토리아 그레이를 마시기 시작한 게 언제였나 찾아보니 8월이다. 6월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최근이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밀크티 마시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고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찻잎은 밀크티 위주로 몇 번 마시면 사라질 분량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도 마시다 보면 이렇게 언젠가는 바닥이 보이고 마는 것이다. 차와 상관없이 허무하고 허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마시는 기간 내내 그렇지야 않았겠지만 시음기를 정리하기 위해 차를 마시는 최근은 정말 너무 힘이 들었다. 영광의 시대건 암흑의 시대건 져야 할 때 져야 하는 것이다. 너무도 긴 암흑의 시대를 살아왔고 얼마 남지 않은 빛을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만 넘치게 쬐더니 결국 눈들이 멀어버렸나 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을 누구나 함께 누리는 새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고 아름다운 홍차를 함께 마시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솔즈베리 평원에 모두 모여 둥글게 손을 잡고 춤추며 차를 마시는 아름다운 상상을 해본다. 진짜 영광의 시대는 그런 거 아닐까. 마침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한국의 남태령에서도 영광의 시대를 여는 빛이 보였다고 한다. 무한한 영광이 그들과 함께 하기를. 빅토리아 그레이,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