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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녹차 옛날 녹차 따로 있나

후쿠주엔 후카무시 센차. 료쿠푸

by 미듐레어

일본 녹차 문화의 중심은 교토라고 할 수 있겠다. 교토에 있는 오래된 차 가게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 후쿠주엔은 19세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어져온 곳이라고 한다. 교토에서의 정통성이니 뭐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고 후쿠주엔이 짱인 이유는 어지간한 백화점 식품 코너에 매장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 가는 곳마다 보이고 눈에 익다 보니 자연히 들어가서 쇼핑을 하게 된다. 한창 봄에 차 쇼핑을 하고 다닐 때 백화점 지하 식품코너에서 교쿠로 하나와 후카무시센차 하나를 사 왔다. 일본 녹차는 마실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어서 아는 것도 거의 없었고 크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교쿠로는 알아볼 수 있었고 제일 많이 팔리는 걸 골라달라고 해서 추천받는 게 바로 이 료쿠푸였다. 일단 남바완이라고 하니 마셔보는 걸로. 45g 한 팩에 720엔으로 상미기한은 제조 270일. 11월 생산된 차겠구나 싶다.

50g 내외의 잎차는 은박진공 지퍼백봉투에 담아져서 이런 종이봉투 포장에 들어있다

우지차를 비롯한 일본 녹차라고 하면 대부분 센차로 생각하면 되는데 특별히 후카무시 센차라고 표기가 되어있는 경우엔 센차의 제조 공정 중 하나인 증청과정을 깊게(더 길게)했다는 뜻이다. 좀 더 빠르고 쉽게 깊은 맛과 선명한 색을 내기 위해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해서 최근엔 대세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후카무시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 녹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종종 했었으니 참고. 아무튼 시즈오카 중부지역을 비롯하여 미에현등은 주로 후카무시 방법으로 센차를 만들고 있다고 최근 알게 되었다. 후쿠주엔 료쿠푸의 경우엔 우지차임에도 후카무시 센차로 만들어졌다. 후쿠주엔 녹차 중에 제일 잘 팔린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후카무시 센차가 대세는 대세인가 보다. 이름이 료쿠푸인데 한자로는 녹풍, 녹색 바람이란 뜻이 된다. 정말 일본스러운 작명이구나 싶은데 이게 낯간지럽게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내가 아직은 일본 감성에 완전 녹아들진 못해서인 것 같다.

꽤나 잘잘한 잎

봉투를 열어서 향을 맡아보면 진한 녹차향이 느껴지는데 늘 이야기하던 기름진 고소한 향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더 마른 향에 가까운 것 같다. 녹풍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바싹 마른 짙은 녹차향이랄까. 건엽을 덜어내니 잘잘한 잎들 사이로 뾰족뾰족한 센차 스타일의 말린 잎들이 보인다. 꽤나 잘은 찻잎들인데 인기에 맞는 맛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제품 설명에도 대놓고 가루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미분을 싫어하는 나에게 어떠한 시련을 줄지 그것도 궁금하다. 참고로 상미기한이 8월인데 7, 8월에 절반쯤 먹고 시음기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까먹고 있던걸 연말이 되어서야 발견하고 뒤늦게 작성 중이다. 차의 향과 맛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앞으론 좀 더 신경 써야지 싶다.

의외로 거름도 잘 되고 미분구름도 많지 않다

레시피대로 1:20의 비율로 70도가량의 물에서 우려내었다. 시간은 30초로 나와있긴 한데 조금 더 길게 가져가도 특별히 떫은맛이 올라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수색은 연둣빛으로 약간의 미분이 좀 뭉치긴 하지만 비교적 맑은 편이다. 후카무시센차임에도 꽤 맑은 탕색을 가지고 있는데 그동안 그래도 나름 네임드 회사에서 구매하는 후카무시는 이렇게 미분구름이 덜 뜨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미분이 많이 뜨는 센차는 방식에 상관없이 제조나 유통의 기술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왔었는데, 내가 구매했던 후카무시들이 가루가 덜 나는 것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맞는 듯 하다. 향이 너무 차분해서 이게 향이 나는 건지 아닌지 갸우뚱하고 마실 때도 엄청 순하다는 느낌 위주로 받았던지라 시음기에 뭐라고 써야 하나 고민만 하다가 묻어둔 차이기도 하다. 순하기가 어느 정도냐면 탕비실의 현미녹차 수준으로 연한 녹차였다. 같은 시기에 마시던 게 후쿠주엔의 교쿠로였어서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는데 은은한 향과 슬그머니 배어 나오는 옅은 감칠맛, 순하디 순한 맛에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면 혀가 슬그머니 말라붙어오는 수렴성이 딸려온다. 존재감이 미약하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바디감이 좋다고 하던데 맞는 말이지만 이제 바디 자체가 워낙 얇은 느낌이라 얇고 옅은 느낌이다. 홍차와는 다른 매력이라고 생각되는 정 반대쪽의 배치되는 맛.

센차 특유의 떡진듯한 엽저

일본 입장에서는 외국인 한국에선 오히려 떫고 쓰고 진한 말차가 유행하고 있는데 오히려 일본에선 순하게 물처럼 마시는 차가 더 유행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러고 보면 농차와 순한 차로 갈라서 극단적으로 순하거나 진하거나 그런 것 같다. 암튼 순하고 부드러운 차를 좋아한다는 인상이 짙은데 그래서인지 바디감이 좋다는 후카무시 센차 조차도 그렇게 바디감이 진하다는 생각보단 부드럽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걸로 봐선 내 기준의 풀바디와는 좀 다른가보다. 그럼 일단 그런 건 제외하고, 감칠맛과 단맛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순한 찻물의 뒤편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재미와 느리지만 묵직하게 생성되는 미지근한 열감 같은 재미있었던 요소들만 따지자면 꽤나 훌륭한 차가 아니겠는가. 깊게 쪄낸 아름다운 우지의 센차는 그럼 여기까지,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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