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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내 마음이 불타고 있잖아요

Fortnum & Mason - 랍상소우총

by 미듐레어

홍차 중에서 호불호가 가장 갈리는 홍차가 무엇일까. 오랜 시간 겪어온 바로는 랍상소우총이 독보적인 호불호 넘버원이지 싶다. 랍상소우총을 쉽게 설명하자면 중국의 복건성 무이산에서 비롯된 정산소종의 일종의 카피랄까. 최근엔 정산소종이라고 해도 비훈연이 대부분이고 훈연을 했다고 해도 옛날과 같은 백송을 해당 지역에서 구하기가 어려워 전통적인 의미의 정산소종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던데 일단 거기까진 구매루트도 모르겠고 딱히 구해볼 생각을 안 해봤다. 암튼 요즘엔 접하기 어려워진 오리지널 정산소종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바로 정산소종으로 인해 생긴 차들이 그 유명한 얼그레이와 랍상소우총이기 때문이다. 훈연향이 가실 무렵이 되면 배화도 높은 소엽종 홍차에서 특유의 단맛과 과일향, 특히 시트러스향이 난다고 하는데 이를 인위적인 가향으로 모방한 것이 바로 얼그레이. 또 다른 갈래로는 훈연향 자체를 더 입히는 가향을 한 것이 랍상소우총이다. 같은 모델인데 굉장히 다른 결과물. 아무튼 나는 랍상소우총 호에 속하고 담배에 대해선 극불호라서 랍상소우총이 담뱃재 맛이라는 표현에는 동의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사람이다. 그나마 그럴싸하다 싶은 것 중엔 소세지 삶은 물과 가장 가까운 것 같다. 랍상소우총은 워낙 여러 브랜드에서 나오고 있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나무향이 진한 편에 속하는 포트넘 앤 매이슨의 랍상소우총을 마셔본다.

랍상소우총 52g, 5월 5일 소분판매. 나름 지퍼백의 위엄.

랍상소우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구매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버렸다.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는데, 나고야에 있는 포트넘 매장에 들렀을 때 소분판매 리스트를 살펴보다가 눈에 띄어서 50g 구매를 했다. 집에 스모키 얼그레이도 있었고 이래저래 개봉이 좀 미뤄지다가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서 개봉했다. 지금 보니 52g이라고 되어있는데 포트넘 소분은 약간 정육점에서 적당히 비슷한 무게로 담은 뒤 g당 계산으로 파는 느낌으로 판매를 한다. 가격이 참 말하기가 애매해진 것이 이날 소분차를 총 4종류를 샀는데 포트메이슨, 애프터눈블랜드, 랍상소우총은 50g, 카운티스그레이를 100g 이렇게 샀고 영수증엔 소분차 3개 2250엔, 소분차 1개 800엔 이렇게만 나와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750엔이거나 800엔이라는 뜻인데 보통 랍상소우총이 다른 세 가지에 비해 가격이 좀 높을 것이고 카운티스그레이는 양이 두 배라 가격이 좀 달라야 할 텐데 도통 어떤 게 얼마인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계산과정에서 실수가 있어서 잘못 계산되지 않았을까 싶다. 뭐 그런 걸 감안해도 포트넘의 유명 블랜딩 소분차 50g에 750엔이라는 가격은 상당한 매리트라고 생각된다. 틴케이스가 필요한 게 아니라면 소분 구매 추천추천. 이왕 방문을 했다면 꼭 소분차를 알아보자.

연기로 질식시킨 차

봉투를 열면 편백향이 마치 히노끼탕처럼 올라오고 그 뒤로 곧장 짜디짠 소세지향 비슷한 게 스쳐간다.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이 아니라 짜디짜고 짜디짜고 짜디짠 소세지. 처음부터 그냥 소세지 가향차라고 소개가 되었다면 랍상소우총에 대한 호불호가 지금보단 줄었을까. 건엽을 덜어내 보니 살짝 자잘한 느낌의 찻잎들이 돌돌돌 말려있다. 줄기들도 꽤나 섞여있다. 점핑이 화려하게 일어나기보다는 조용히 롤링이 풀리면서 가라앉는 스타일의 모양을 하고 있다. 건엽에서 나는 향이 조금 더 소세지 느낌으로 변하는데 향에서 짠내가 난다기보다는 이런 향의 소세지를 먹었을 때 느꼈던 짠맛이 자꾸 떠오르는 게 아닐까 싶다.

스누피

늘 우리 던 비율로 우려 본다. 6g의 차를 300ml, 100도씨의 물로 2.5분 우려낸다. 랍상소우총은 보통 치즈나 진한 초콜릿케이크등을 함께 권하는데 개인적인 픽은 조금 무거운 샌드위치부터 몬테크리스토 같은 튀긴 빵, 심지어는 햄버거까지 아무튼 헤비 한 걸 곁들이는 게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성심당 튀김소보루. 우림팟에 향이 밸 것 같은 진한 훈연향이 2.5분 동안 퍼져나간다. 실제로 바로 헹궈주지 않으면 잔향이 좀 남는 편. 잔에서 흘러넘치는 스모키 함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한 모금 마셔본다. 의외로 부드러운 차맛이 순하게 입을 적시고 지나간다. 향도 오히려 구강뒤로 올라오는 향은 그리 강하지 않다. 겉바속촉으로 겉으론 엄청 스모키하고 강한 향인 것처럼 굴지만 막상 마셔보면 순하고 코로 직접 들어가는 향에 비해 입안에선 얌전하다. 그래서 팥 들어간 튀김소보루와 궁합이 좀 맞는 편. 식어버리면 오히려 물맛이 좀 느껴질 정도로 차 자체는 좀 연한 편이지 않나 싶다. 소엽종이라서 그런 건가.

은근 자잘

포트넘 랍상소우총은 나무 탄내가 유독 짙은 편으로 기억하는데 실제로 회사에 가져가서 두어 번 마시고는 다시 집으로 가져와야만 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랍상소우총만 우려서 자리로 가져오면 2분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두리번거리면서 뭐 타는 냄새난다고 실제로 겁을 먹어서 사무실에선 안 되겠구나 하고 집으로 다시 가져왔다. 뜨거운 엽저를 식기 전에 향을 맡아보면 정말 뭐 타는 냄새 같기도 하다. 랍상소우총의 매력은 이런 짙은 스모키 함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엔 내 마음 어딘가에 천불이 나서 무슨 차를 마셔도 랍상소우총 같고 랍상소우총을 마셔도 내 머릿속이 더 스모키 하다. 이 불이 누군가를 불사르게 될까 매일 두려운 마음이다. 마음으로 매일매일 화형식을 지켜보는 기분. 정말 차맛 나지 않는 나날을 지나간다. 비흡연자인 나에겐 어쩌면 담배대용의 느낌인지도.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하는 옛날 사람의 뻔한 농을 남기면서 포트넘의 랍상소우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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