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주엔 - 유자녹차
지난가을 다카마쓰 여행에서 들렀던 후쿠주엔. 그전에 샀던 교쿠로라던지 후카무시 센차가 마음에 들었던지라 다카마쓰에서도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걸 집어왔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유자녹차였다. 티백은 잘 사 오지 않는 편이지만 어째 유자녹차는 잎차는 팔고 있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맛있을 것 같아 결국 하나 집어오게 된 유자녹차.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마셔본다. 한창 신차가 나올 때이건만 내가 안 마셔봤으면 아직 신차지 뭐. 티백 10개들이 918엔으로 상미기한은 대략 1년이 좀 안 되는 것 같다.
국산 유자를 카부세차와 블랜딩 했다고 한다. 카부세차 특유의 부드러움과 우마미가 유자와 잘 어울리는 모양. 유자라고 했을 때 어떤 맛이나 향을 말하는지가 워낙에 다양해서 과연 어떤 느낌일지가 또 이 차를 개봉하는 관전 포인트겠다. 그 외에도 냉침 레시피가 적혀있는 게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인데 120ml에서 15분, 그러니까 시간만 핫티의 딱 10배 되는 시간으로 늘려서 냉침하라는 이야기. 아마도 상온의 물에 담가두고 우리는 시간인 듯하다. 냉장고로 직행하면 시간을 더 길게 가져가야 할 듯. 고작 10개짜리 티백이라 얼마나 다양하게 마셔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후쿠주엔의 차들 중 종이패키지에 들어있는 애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종이봉투 안에 은박 지퍼백이 들어있고 그 안에 티백이 10개 들어있다. 봉투를 열어 향을 맡아보면 시트러스 껍질을 오래 말린듯한 씁쓸하고 마른내가 가장 먼저 난다. 약간은 후추 같은 뉘앙스의 향이다. 여태 맡아온 유자향과는 또 결이 살짝 다른 향이라서 신선한 이미지. 티백이라 안이 잘 보이지 않아 하나 뜯어내보니 짙은 녹색의 찻잎들과 간간히 연둣빛 잎들이 섞여있다. 유자껍질이 아주 잘게 잘라져서 들어가 있는데 크기나 양에 비해 향은 꽤 강한 듯. 이제 마셔봅니다.
100℃ 물 120ml에 티백 하나를 담가 1.5분 우려냈다. 물이 좀 뜨거웠는지 유자향보다 녹차향이 더 짙게 감돈다. 한 모금 마셔보면 카부세차 특유의 은은한 단맛과 투명하게 뽀얀 녹차의 우유 같은 부드러움과 구수한 밤향등이 모두 느껴지고 그 뒤로 시소 같은 일본깻잎 같은 풀향이 싱그럽게 맴돈다. 카부세차 자체가 꽤나 맛있는 듯. 후쿠주엔의 카부세차 메모. 아주 약간 더 식은 물에서 우려내면 청귤의 새콤한 향과 함께 시트러스가 더 잘 살아난다. 흔히 알고 있던 유자청의 맛도 아니고 일본음식에서 흔히 접하는 유자껍질향도 아닌 귤과 라임의 중간쯤 되는 새콤한 향과 맛이다.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생귤탱귤등에 있는 청귤향이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달달한 감미료라도 들어간 것처럼 단맛이 느껴지는 착각마저 든다. 분명 온도가 높은 차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종류의 직설적인 단맛이다. 아마도 카부세차와 유자향이 딱 맞아떨어지는 스윗스팟이 있는 듯. 좀 더 다양한 온도를 정확히 테스트해보지 못한 게 좀 아쉽다.
냉침을 해보지 않을 수 없는데 120ml 냉침은 좀 감질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티백이 그리 많지 않아서 어찌저찌 150ml쯤 되게 생수병에 물을 남겨 냉침해 보았다. 냉침은 집에서 마시지 않아 적절한 사진이 없는 게 아쉽구만. 와, 병뚜껑을 열자마자 팟 하고 튀어나오는 생귤탱귤향. 따뜻한 차에서 느껴졌던 청귤의 향이 훨씬 더 싱그럽게 터져 나온다. 갓 짜낸 귤 같은 향인데 물론 인공적이지 않고 냉침 특유의 부드러움이 돋보인다. 한 모금 마셔보면 역시나 가볍게 한번 짜낸듯한 녹차의 맛이 일품이다. 삼다수 같은 가벼운 물에서는 깔끔함이 느껴지고 약간의 미네랄이 더 들어있는 물에서는 녹차의 깊은 맛과 우마미가 좀 더 증폭된다. 어느 쪽이든 훌륭해서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좋을 듯하다. 보통은 차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좋지는 않을 거라 가벼운 물로 냉침하는 편이지만 이건 좀 하는구만.
이 시음기는 3주를 묵혀서 올리는 시음기로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비행기에서도 끄적이고 호텔방에서도 끄적였던 시음기이다. 이제야 내보낼 수 있게 되어 매우 후련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차를 다 마신 게 아쉬운 마음도 크다. 은연중에 아껴마시고 있었던 듯. 지금 찾아보니 해당 상품을 팔고 있지 않은데 계절한정으로 잠깐씩 나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일회성인지 알 길이 없다. 가능하다면 몇 봉지 사다가 얼려두고 싶을 정도로 입에 잘 맞았던 차.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유자의 카테고리에서 조금은 벗어난듯한 향이지만 상큼 달달하게 입안을 맴돌던 후쿠주엔의 유자녹차,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