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252. 다마스크 로즈
다마스크 로즈는 장미 품종의 하나로 다메섹, 다마스쿠스 지역의 지명을 따서 이름 붙은 장미이다. 향도 향이고 분홍빛의 큼직한 꽃으로 유명한데 향료 산업에서는 거의 최고의 장미로 꼽힌다. 물론 가격도 비싼 편으로 고급 장미에 속한달까. 루피시아에서는 장미가 필 무렵인 5월을 겨냥하여 대략 4월 초에 다마스크 로즈를 계절 한정으로 출시한다. 세세한 계절 한정들의 일정표를 뽑으면 최소 12절기는 나올 것 같은 루피시아. 암튼 장미 하면 베르사유의 장미라던지 너는 장미보다 예쁘지는 않지만이라던지 장미 없는 꽃집이라던지 이런 거나 생각나는 옛날 사람이자 평소 장미를 즐기는 편도 아닌 나이지만 슬슬 장미 블랜딩을 마셔본지도 오래된 것 같아 시음기를 써보기로 했다. 사실 장미계열 차들이 몇 있는데 길게는 일 년도 넘게 묵히고 있는 시음기들도 있어서 시리즈 비슷하게 진행될지도 모르겠다. 이젠 체념하고 둘 곳이 있거나 말거나 사게 되는 한정 일러 틴 30g에 1230엔, 봉입 30g이 850엔이다. 가격은 익숙한 숫자인데 양이 30g으로 훅 줄어든다. 상미기한이 제조 후 반년으로 짧은 편.
분홍의 다마스크 로즈가 깔끔하게 일러스트 된 토파즈 캔. 내지가 좀 심플하다 못해 성의 없어 보이기도.
부루가리아산 다마스쿠로오즈노 텐넨유라이노 카오리오 젠타쿠니 마토와세타, 키힌 아후레루 바라노 코오챠.
불가리아산 다마스크 로즈의 천연 유래의 향을 풍부하게 입힌, 기품 넘치는 장미 홍차.
영문 버전에 보면 고급 실론에 다마스크 로즈는 에센스를 넣었다고 한다. 그렇지, 다마스크 로즈하면 비싸다는 로즈 에센스 오일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비싼 에센스로 가향한 실론이니 다른 차들에 비해 가격이 살짝 있는 게 납득이 된다.
봉투를 열면 은은하게 장미향이 퍼져나간다. 마치 실제 장미 한 다발을 저기 어디에 꽂아둔 것 같은 향이다. 장미 생화처럼 물기 젖은 싱그러운 향을 기대하며 봉투에 코를 박았는데 오히려 약간의 먼지냄새 같은 발효취가 있다. 루피시아 특유의 풍선껌 향이나 휘발향은 없는데 오히려 마른내와 발효취가 살짝 느껴진다. 루피시아스럽지는 않은 향이다. 이거 본격 홍차겠는데 싶은 향. 건엽을 덜어내 보면 꽤 긴 실론위주에 토핑으로 로즈페탈이 잔뜩 들어있다. 꽃잎 사이즈를 봐서는 토핑은 다마스크 로즈는 아닌 거 같지만 그 비싸고 큼직한 다마스크 로즈를 직접 블랜딩 했다면 가격상승 요인이지 않았을까. 에센스 가향 없이 고급 홍차에 다마스크 로즈를 직접 넣어서 블랜딩 하면 어떤 맛일지 궁금하긴 하다. 어딘가에선 팔겠지.
우리 던대로 6g의 차를 100℃의 물 300ml에서 2.5분 우려냈다. 따라낼 때부터 로즈티의 향이 진하다. 인공적인 장미향이 뿜뿜 하는 것도 아니고 의외로 소박하게 홍차의 온기를 타고 차의 향과 함께 블랜딩 된 느낌으로 장미향이 퍼져나간다. 한 모금 마셔보면 미니장미를 잔뜩 넣고 우리는 순수 장미차만큼 자연스러운 진한 장미향이 나는데 그쪽의 장미차 특유의 강한 수렴성은 또 느껴지지 않고 꽤 부드러운 홍차가 느껴진다. 부드럽기는 하지만 장미향에 밀리지 않는 홍차의 향과 맛이 제법이다. 그리고 뒷맛으로 아주 옅게 느껴지는 단맛. 이 단맛이 다마스크 로즈 가향에서 오는 건지 혹은 실론티 자체에서 나는 차의 단맛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은하게 느껴지는 이 단맛이 루피시아 다마스크 로즈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다른 로즈티들에서 느껴지는 달달한 느낌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실질적인 단맛. 감미료라도 들었나 싶었는데 역시 그건 아니라고 한다.
루피시아 다마스크 로즈는 달달한 로즈티의 전체적인 인상이 니나스를 떠올리게 한다. 니나스의 대표 블랜딩인 마리 앙투와네트도 크게는 로즈티에 가까운데 사과가 첨가되어 있어 딱 로즈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과향만 빼면 다마스크 로즈와 거의 비슷한 맛과 향이다. 프리미엄 라인인 벵돔 버전에서는 베이스인 실론티 조차도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다 떠나서 니나스의 기본적인 로즈가향이 딱 이 다마스크 로즈의 향과 일치하기 때문에 마실 때마다 니나스가 떠오르곤 했다. 다른 유명한 로즈티들인 위타드의 잉글리시 로즈라던지 포트넘의 로즈포총도 고유의 특징적인 향이 있는데 다마스크 로즈는 그런 쪽보다는 니나스 계열로 묶이는 것 같다.
올해는 베르사유의 장미도 리메이크된다고 하고 뭔가 미뤄뒀던 로즈티를 잔뜩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장미의 계절을 기다리며 일찌감찌 시음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긴 해외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와보니 이미 장미가 사방에 피어있다. 장미시즌을 이 글로 열어제끼지 못해서 좀 아쉽지만 본격적인 장미축제 시즌에는 맞춘 거 같으니 그럭저럭 세이프. 화려한 장미향과 피니쉬의 단맛까지 인상적이었던 최고의 장미 다마스크 로즈,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