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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은 아니어도 굉장한 애들이 있다

루피시아 8284. 백도센차

by 미듐레어 Jun 3. 2025

벌써 두 달이 되어가는 예전 헤프닝이다. 어느 날 쿠팡에서 루피시아 백도센차를 6600원에 판다는 소식을 듣고 미끼상품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는데 아니 글쎄 로켓 그거라서 배송비조차 받지 않는, 그것도 일러캔으로 팔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쿠팡이 루피시아를 알아본 건가 싶어서 얼른 다른 상품들도 검색해 봤는데 유독 이 상품만 특가로 팔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상미기한이 올해 6월 말부터 그 이후라고 작게 적혀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미임박이라고 해도 할인율이 너무 높아서 사지 않을 수 없었던 나. 일주일도 안되어 상품을 받았는데 다음날인가 거기서 한번 더 반값을 후려쳐서 3300원에 무료배송을 또 하고 있길래 무려 6통을 추매 했던 것이다. 졸지에 백도센차 깡통을 8개나 갖게 된 사람. 냉침으로 워낙 유명한 차라서 6월에 있을 행사 때 사용할 목적으로 쟁여두었다. 다시 생각해도 참 말도 안 되는 가격인데 역시나 장안의 화제였는지 주변에 많은 분들이 줍줍 해가신 것으로 확인되었다. 나는 마침 홍차버전 모모의 시음기를 언제 쓰나 하고 있던 차에 셋트로 차분히 마셔볼 기회가 생겨서 럭키. 일러스트 캔입 50g에 1280엔, 봉입 50g은 950엔이지만 아무튼 쿠팡특가로 구매한 백도센차. 상미기한은 제조 1년으로 작년 6월에 만들어진 상품이겠다.

한정 아닌 디자인 캔

상미기한 임박 상품이란 건 그만큼 재고를 쌓아놨단 이야기일 텐데 우선은 무지 라벨이 아닌 어쨌든 일러스트 틴으로 재고를 쌓아놓은걸 칭찬(?)해야겠다. 아마 녹색 바탕에 심심하게 이름만 적혀있는 틴이었다면 아무리 싸다지만 판매율이 좀 떨어지지 않았을까? 차분하게 백도가 그려져 있는 심플한 디자인이 오히려 더 안정감을 주는 듯하다. 캔을 열어보면 늘 그렇듯 라벨 없이 일련번호만 찍혀있는 은박봉투가 나오고 앞뒤로 일어, 영어로 표기된 별도의 라벨지가 있다.

카쥬우 아후레루 아마쿠 미즈미즈시이 하쿠토오노 카오리오, 죠우시츠나 니혼노 센챠니 마토와세마시타. 사와야카나 아지와이데스.
과즙이 가득 넘치는 달콤하고 싱그러운 백도 향을 고급 일본 센차에 입혔습니다. 상쾌한 맛입니다.

상쾌한 맛이라고 적혀있는걸 보아 차광을 하거나 하지 않은 시즈오카 센차 느낌의 차가 아닐까 싶다. 재미있는 건 레시피의 온도인데 무려 90-100℃라고 적혀있다. 일반적으로 센차를 저렇게 뜨거운 물에 데치면 너무 쓰거나 하지 않나? 싶은데 생각해 보면 우마미가 강조되지 않은 차들은 온도가 좀 높았던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녹차를 100℃ 에 삶는 경험은 흔치 않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상급으로 보이는 센차

봉투를 열면 루피시아의 전매특허인 휘발성 가향가스가 확 날아오른다. 시큼하니 코를 팍 스치고 지나가면 그제서야 약간의 풀내음과 함께 산뜻한 백도 가향이 느껴진다. 같은 복숭아 향이라도 모모는 어딘가 민티한 가벼운 발효취 같은 느낌이 좀 있다면 확실히 모모센차는 분유처럼 우유 달달한 냄새가 섞여난다. 복숭아맛 말랑카우 같은 향이랄까. 건엽을 덜어내 보니 의외로 로즈가 들어있는데 향은 거의 없고 장식용 토핑인 듯하다. 허긴 로즈가 물 빠지면 백도 속살 비슷하게 색이 나오긴 하니까. 얼핏 봐서는 교쿠로 쪽은 아닌 것 같은 센차다. 제법 길쭉 큼직한 찻잎이라 기분이 좋다. 건엽에서도 계속해서 향이 폴폴 솟아오르는 걸 봐선 가향이 제법 세게 들어간 것 같다. 상미가 상미인지라 자꾸 신경 써서 확인하게 되는데 딱히 어디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센차의 기운이 센거 같아서 화과자를 불러왔다

6g의 찻잎을 100℃의 물 300ml에서 1.5분 우려냈다. 센차를 100℃에 우리는게 아무래도 어색해서 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은데 의외로 티팟에서 우려 지는 모양이 수색도 맑고 나쁘지 않게 우러나는 모양이다. 안심하고 티팟에 따라내는데 가향 그대로의 향이 나는 건 물론이고 센차의 그 콩고물 같은 고소한 향도 함께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한 모금 마셔보니 이거지 싶은 풍선껌스런 진한 복숭아 가향. 가향이 너무 진해서 자칫 꽃향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역하게 느껴지는 방향은 아니고 화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에서 그친다. 항상 느끼지만 루피시아는 가향센차의 차품이 나쁘지 않아서 이번에도 우유같이 뽀얀 향이 느껴지는 뽀송한 센차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앞으론 센차를 100℃에서도 한 번씩 확인해봐야 하는 걸까 싶을 정도. 혹시나 싶어 한 김 식힌 물에서도 우려 보았는데 확실히 향도 덜하고 그냥 순한 녹차의 느낌이다. 편한 느낌으로 치자면 이쪽이 더 좋았으나 아무래도 100℃가 더 재미는 있었다.

모모카스테라와 함께

아이스티를 빼먹을 수 없는 차. 급랭으로도 만족스러웠지만 역시나 냉침 쪽이 더 취향이었다. 보통은 냉침으로 가는 듯. 아무래도 이 차의 가장 큰 매력은 모모가향의 진함에 밀리지 않는 달달고소함이 살아있는 센차에 있는 것 같다. 보통 홍차가 있는 가향차의 녹차 버전은 불어로 vert라고 애초에 이름을 붙이는데 백도센차의 경우엔 영문명에만 momo vert라고 되어있지 따박따박 백도센차라고 되어있다. 그에 맞게 백도스런 상큼함이 가향 안에도 녹아있고 센차의 맛 자체가 빵빵하게 잘 우러난다. 아무래도 백도가향은 모모우롱극품이라는 압도적인 1위 상품이 있어서 가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차맛 자체로 놓고 보자면 센차가 좀 더 빵빵한 느낌이라서 취향에 따라 백도센차가 더 좋다는 사람도 꽤 있을 것 같다. 일단 가격면에서 메리트가 있으니까 냉침용으로 팍팍 쓰기에도 이쪽의 선호도가 더 높을 수도 있겠다.

포동포동한 엽저

루피시아의 모모가향은 언제 마셔도 항상 감탄하게 되는데 서양 복숭아와는 다른 백도 복숭아의 향을 정확히 짚어놓은 그 지점이 마실 때마다 신기하고 짜릿하다. 가향이 너무 진하면 거부감이 들기 마련인데 그 선을 넘지 않는 기가 막힌 완급조절도, 적당히 이로하스 마냥 향이나 잘 나면 되겠지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구수달달하면서 투명한 센차가 우러나는 점까지 정말 굉장한 블랜딩이라고 생각한다. 모모우롱과의 카니발리제이션만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으리라 생각되는 아쉬운 차. 아마도 그런 점을 알아보고 쿠팡의 누군가가 물건을 쟁여둔 게 아니었을까? 재고관리에 실패하시긴 하셨지만 저는 그 결정 존중합니다. 덕분에 행복했어요. 그러고 보니 이 시음기를 두 달 가까이 잡고 있었구나. 얼른 보내줄 때가 되었다. 얼레벌레 봄의 끝무렵에 수많은 차인들에게 할인의 기쁨을 주었던 모모센차,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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