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주엔 - 숙성교쿠로
작년 가을 후쿠주엔에서 구매한 숙성교쿠로. 일단 교쿠로가 마음에 들었던 후쿠주엔 인지라 숙성교쿠로도 당연히 맛있겠지 근데 뭔 차이가 있는 걸까 싶어서 사 왔던 그것. 시간이 차곡차곡 흘러서 이렇게나 상미기한을 꽉 채워서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햇차 시즌이 다 되어서 작년 차를 마시면 항상 후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매번 시기를 맞춰서 따박따박 소비를 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눈에 띌 때 쟁이는 걸 반복하게 되고 그렇게 집에 쌓여있는 차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그래도 올봄은 시음기 남기겠다고 끙끙거리며 차를 아끼는 일은 없었어서 소비속도 자체는 순조로운 것 같다. 시음기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애초에 차를 넉넉히 구매하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대충 메모만 해놓고 홀랑 다 마신뒤에 시음기를 쓰기도 하고. 숙성교쿠로도 마시기는 진즉에 다 마셨는데 뒤늦게 마무리하는 시음기이다. 상미기한이 지나 보이는 건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지나면 어때. 아무튼 후쿠주엔의 숙성교쿠로 40g, 가격은 1500엔에 세금 더해서 1620엔으로 1년 좀 안 되는 상미기한인 듯.
후쿠주엔의 스몰사이즈 패키지에 맞춰 종이봉투+은박지퍼백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이 되는 녹차라인들이 별도의 이름과 함께 대나무 같은 격자문양의 디자인으로 통일된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과 별개로 파생되어 만들어지는 녹차들은 이렇게 별도의 디자인을 주는 경향이 있는데 해가 지고 난 직후의 하늘 같은 강렬한 디자인이 뭔가 맛도 강렬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정확히 어떤 인상을 주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건 역시 교쿠로의 레시피인데 레귤러 상품인 교쿠로 '킨카쿠'와 동일한 레시피를 사용하고 있다. 3g의 차를 사용하여 잔에 따라지는 건 약 20ml 정도의 녹차가 나오는 극도로 진한 추출법으로 비교적 저온에서 천천히 우려내어 떫은맛은 거의 없게끔 우려내는 방법이다. 누구는 미역국 식은 국물 같다고도 하는 바로 그 추출법이다. 이런 스타일이 싫다면 온도를 조금 올리고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좀 더 일반적인 녹차에 가깝도록 우릴 수 있겠지만 나는 미역국 좋아하므로 저대로 간다.
봉투를 열어서 향을 맡아보니... 어? 이거.. 시래기 아뉴. 교쿠로의 향이 없어졌냐 하면 그건 아닌데 묘하게 그게 시래기의 그 향을 닮아버렸다. 달리 말하자면 교쿠로 향과 시래기 향이 뭔가 연결점이 있다는 건데 머리로는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그걸 한번 느끼고 나니 건엽에서 나는 이 향이 시래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되었다. 나무바구니 위에서 햇살을 받으며 말라가는 딱 그 향처럼 시원하고 쌉쌀한 흙냄새 섞인 그런 향이 난다. 잎이 좀 부스러진 경향이 있는데 원래 그런 건지 장기간 보관하다가 내가 부스러기를 만들어버린 건지 모르겠다. 킨카쿠 생각해 보면 이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킨카쿠도 이때 같이 사 온 게 많이 부스러져 있었던 기억. 캐리어에 넣고 가져오는 과정에서 많이 눌리거나 그랬나 보다. 이건 알 수 없는 영역.
9g의 찻잎을 예열된 다구에 넣고 40℃의 물 90ml를 부어 2.5분 우려 주었다. 잔에서 나는 진한 아미노산국물의 그 교쿠로향에 약간의 구움 과자향이 버터리하게 스쳐가는 듯하다. 버터리한 이 향이 뭐지? 확실히 그냥 교쿠로와는 다른 향이다. 한 모금에 털어 넣어도 될 양과 온도이지만 천천히 한 입을 쪼개어 마셔본다. 김가루를 손가락으로 싹싹 긁어서 쪽 빨아먹는 맛이다. 감칠맛의 대 폭발 짭짤고소 풍미. 이 맛에 교쿠로 마시는 거 아니겠는가. 조심스레 한 잔을 마시고 계속 계속 우려낸다. 보통 교쿠로들이 3포면 수명을 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차도 그쯤이면 교쿠로로서의 맛은 거의 다 하는데 4포쯤부터 반전이 일어났다. 옅은 차맛에 은은한 단맛이 돌아서 이미 수명을 다한 엽저를 자꾸 헹궈먹게 된다. 약간 줄기차에서 나는 은은하고 상쾌한 맛에 가까운 맛이 연하게 계속 나는데 이쯤 되면 우려먹는 게 아니라 정말 헹궈먹는 느낌이다.
이름에 숙성이 좀 붙었다고 이렇게 재미있는 옵션이 붙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내포성이 좋다면 서양식으로 100℃에서 한방에 뽑아내는 방법도 써볼걸 하는 아이디어도 뒤늦게 떠오르지만 재밌게 다 마셨으면 됐지 뭐. 역시나 40g밖에 안되다 보니 호쾌하게 팍팍 마시지는 못했던 것도 조금은 아쉽다. 100g 정도는 마셔줘야 그냥 기억에만 의존해서도 글이 줄줄 써지는 모양이다. 한참 전에 다 마신차에 대해서 적으려니 중간중간 뭐 빼먹은 게 없나 싶은 생각만 든다. 쥐어짠다고 좋은 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흐르는 대로 숙성교쿠로마냥 밍밍하면 밍밍한대로 붙여두는 게 답일 수도 있겠지. 푸근하게 잘 쉬어갈 수 있었던 숙성교쿠로,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