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239. 로즈 다즐링
올해 들어 느끼는데 장미의 시즌이 생각보다 참 길다. 이래저래 글도 잘 써지지 않고 시음기와 무관하게 다른 차들을 마시면서 시간을 많이 보내느라 장미시즌에 맞춰 계획했던 시음기들을 다 접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길을 걸을 때마다 장미가 계속 보이고 쉽사리 계절이 끝날 것 같지 않아 하나라도 다시 들고 와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로즈 다즐링. 레귤러로 알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계절 한정으로 바뀐 데다 특이하게 다마스크 로즈가 나오기 전인 사쿠라 시즌 직후에 나와서 다마스크 로즈가 한참 팔릴 때 슬슬 판매가 마무리되는 상품이다. 딱히 장미시즌도 아니고 다즐링시즌도 아닌 어중간한 시기에 나와서 사려고 보면 없던 상품인데 마침 후쿠오카에 한정 상품을 사러 들렀다가 함께 구입했다. 50g 봉입이 세금포함 900엔이지만 면세를 받아서 833엔에 구입. 2월 말에 판매가 시작되었는데 상미기한이 내년 12월인 걸로 보아 흔한 가향홍차들처럼 상미기한은 제조 2년인 듯하다. 12월에 만들어뒀다 2월부터 파는 건가.
역시나 가향이 들어간 차로 다즐링에 로즈 가향을 조금 더 하고 로즈레드를 토핑으로 넣었지 싶다. 아직도 의문인 계절한정으로의 변경 이유를 자꾸 생각해 보게 되는데 아무래도 다즐링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거나 판매가 부진해서 재고관리가 어렵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닐까.
로-즈노 호-코-토 하나비라가, 다-지린노 후-미니 시젠니 토케코무 유-비나 코-차.
장미의 향기와 꽃잎이 다즐링의 풍미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우아한 홍차.
설명도 특별한 내용은 없고 그냥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구매자 입장에서 제일 궁금한 건 장미시즌의 메인인 다마스쿠 로즈와 어떻게 다르냐는 점이겠는데 물론 실론 베이스의 다마스쿠 로즈와 다즐링 베이스인 로즈 다즐링은 그 베이스부터 직관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겠으나 똑같은 느낌에 베이스만 다르다는 건지 아니면 베이스에 따라 좀 다르게 블랜딩을 한 건지가 사뭇 궁금하다. 인터뷰라도 해보고 싶고 일본어 사이트라도 뒤져보고 싶지만 그게 쉽지가 않구만. 그렇다면 직접 마셔보고 알아보는 수밖에.
봉투를 열어 향을 맡아보면 은은 달달한 로즈향이 의외로 휘발성 거의 없이 순하게 풍겨오고 그 뒤로 구수꼬릿한 발효취가 섞여 올라온다. 그렇다고 인지부조화가 올 것 같은 매주 된장 그런 향이 아니고 로즈향과의 조화가 약간은 말린 크랜베리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의 다즐링은 아무리 어텀널이라고 해도 마른풀냄새가 강하지 발효취가 있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특별히 고른 다즐링을 사용한 건지 아니면 가향 에센스와 섞이면서 추가적인 발효가 일어났는지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단순히 산화도의 문제가 아니고 미세하게나마 직접발효가 관여한 느낌이다. 일반적인 제다환경에서 직접발효를 원천 차단한다는 것도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니 보통의 다즐링보다 관여도가 조금 더 높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 나에겐 이쪽이 훨씬 오소독스한 옛날식 다즐링의 느낌이긴 하다. 건엽을 살펴보면 확실히 산화도가 꽤 있는 다즐링 사이로 꼬릿 한 로즈레드들이 섞여있다. 베이스티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개봉 전에 예상했던 그대로이다. 꽤나 평범해 보인다.
찻잎 6g을 100℃의 물 300ml로 2.5분 우려낸다. 다즐링에도 자비 없는 끓는 물이다. 건엽을 보아하니 삶아내도 크게 지장이 없을 것 같은 찻잎이다. 차를 따라내니 은은한 장미향이 퍼져나간다. 잔에 코를 대고 맡아보면 구수한 향이 더 확실해진다. 한 모금 마셔보면 확실히 다마스크 로즈와는 다른 차품인게 다마스크 로즈의 그 직설적인 단맛이 아닌 순한 다즐링의 느낌으로 약간은 푸릇한 다즐링의 맛이 적절히 구수하게 퍼져나간다. 약간은 누룽지 같은 맛. 그렇다고 홍배를 진득하게 한 구운 맛 까진 아니다. 다마스크 로즈에 비해 연하고 부드럽기 때문에 보통은 찐해찐해 홍차여서 크림티를 무조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다른 로즈티들과는 또 다른 결이다. 아쌈이나 닐기리 같은 전형적인 인도 홍차에 비해 다즐링이 갖는 부드러움 때문 일 텐데 그 느낌이 로즈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다즐링의 차향을 살짝 덮을 정도로만 그 향이 블랜딩 되어있어서 차도 가향도 연하다는 느낌이다. 홍차스러움과 약간의 풋풋함을 동시에 지녔고 강한 인상은 아니지만 착실히 볼륨감을 보여주는 다즐링의 차품에 달짝지근한 맛을 딱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온전히 녹아들어 간 장미향이 벨런스가 좋다. 다마스크 로즈를 생각하면 화려함과 단아함의 대비정도 될 것 같다. 아무래도 이건 라이벌 구도 느낌인데 무슨 김완선 강수지도 아니고.
최근의 다즐링이 다원차라던지 퍼스트 플러시로 갈수록 자꾸 백차에 가까운 제다가 유행이라 이렇게 홍차스럽게 착 달라붙는 다즐링을 만나니 참 반갑다. 트와이닝의 프리미엄 다즐링도 그렇고 아무래도 나는 옛날 느낌의 다즐링이 취향인 듯. 게다가 루피시아의 장미 가향은 원래 이렇게 괜찮았나 싶을 정도로 올해의 발견 느낌이다. 루피시아에서 로즈를 마셔보는 게 처음이 아닐 텐데 다마스크 로즈를 비롯해서 로즈 다즐링까지 로즈 가향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진하고 달달하다. 장미시즌을 맞이하여 마셔본 두 차 모두 만족스러웠지만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줬던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청순대 섹시 같은 진부한 라이벌 구도 정말 싫어하지만 연하게 단아한 매력을 뽐내는 로즈 다즐링을 마시고 나니 청순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다마스크 로즈와 비교하면 더더욱 단아함과 화려함의 대결인데 청순대 섹시라고 붙여도 이상하지가 않다. 올해의 로즈티는 일단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로즈 다즐링,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