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7491. 시즈오카 쿠키차
루피시아에서 종종 공개하는 판매순위에 보면 늘 쿠키차가 끼어있어서 신기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쿠키차는 쿠키 가향차를 말하는 게 아니고 (물론 그쪽의 차도 있다) 녹차를 채엽할때 같이 채엽하게 되는 줄기 부분을 모아서 만드는 차로 봉차, 쿠키차, 시라오레 등등을 이야기할 때의 쿠키차로 이게 항상 판매 상위권이라는 게 현지 감성을 모르는 나에겐 좀 의외로 느껴지곤 한다. 봄에 그랑마르쉐에 갔더니 무려 그랑마르쉐 한정으로 팔고 있었던 시즈오카 쿠키차를 발견하여 냉큼 집어왔다. 드디어 나도 의문의 인기 아이템을 접해보게 되는구나. 시음이 없어서 묻지마로 장바구니에 던져 넣었는데 생각해 보면 시음이 있었어도 일단 장바구니에 넣고 시음하지 않았을까? 참고로 그랑마르쉐 영수증을 보니 4만 엔이 넘게 나왔다. 입장 전에 아내에겐 "온라인 그랑마르쉐로 3만 엔 넘게 샀으니까 이번엔 얼마 살게 없을 거야"라고 말하고 들어갔던 게 기억난다. 그냥 루피시아에 취업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무튼 쿠키차, 사 왔다. 단위는 100g 봉입으로 상미기한은 아마도 반년쯤 되는 것 같다. 4월 초 구매인데 8월까지로 표기되어 있다. 가격은 650엔으로 저렴. 아무래도 그랑마르쉐라서 그런 것 같다.
일단 100g 단위의 봉지임에도 평범하게 83mm 너비의 일반 라지 봉투에 들어있어서 큰 용량인걸 놓칠 수도 있는데 확실히 무게감이 다르긴 하다. 줄기위주라 밀도 있게 잘 담기는 모양이다. 같은 사이즈의 봉투여도 어떨 땐 30g 겨우 들어가는 느낌이고 어떨 땐 100g이 넉넉히 들어간다.
슛키리토 카오리타카이 이치반차노 쿠키오 아츠메마시타. 아오쿠 사와야카나 요인토 조오힌나 아마미오 오타노시미 쿠다사이.
깔끔하고 향기로운 첫차의 줄기만을 모았습니다. 푸르고 상쾌한 여운과 우아한 단맛을 즐겨보세요.
이렇게 존댓말을 하는 라벨은 또 처음인 것 같은데. 줄기차라고 하면 어쩐지 깔끔하고 구수한 맛이 날 것 같은데 시즈오카 차라고 하니 또 푸릇하고 깔끔 달달한 맛이 떠오르기도 한다. 레시피가 재미있는데 무려 3~4g에 시간은 30~45초로 거의 담갔다 빼는 수준이다. 온도가 열탕이라고 되어있는데 시간이 짧으니 진짜 100도에서 짧게 치고 빠져도 될 것 같은 느낌.
봉투를 열어보니 상쾌한 말차향이 난다. 뜬금없이 진짜 말차의 향이 폴폴 나거나 할리는 없고 줄기차이다 보니 가공 과정에서 이래저래 발생한 부스러진 가루들이 고스란히 분말처럼 작용하면서 말차향 비슷하게 향이 올라오는 듯. 코에서 촉각 비슷하게 인지하는 느낌이 후각신호로 착각을 일으키는 것 같다. 상쾌하고 달달한 것이 확실히 아주아주 가벼운 녹차의 느낌이 든다. 묵직한 센차들과는 반대쪽에 있는 페트병 녹차같이 깔끔하고 상쾌한 느낌의 향이다. 건엽을 보면 줄기를 짧게 톡톡톡 잘라놓은 모양으로 알고 있던, 생각했던 쿠키차의 모습 그대로.
8g의 찻잎이 제법 수북한데 예열해 둔 팟에 솨아아 담아준다. 한 김만 살짝 날려 90℃는 넘을 정도의 물로 300ml 부어준 뒤 짧게 30초 이상만 우려서 빼냈다. 쿠키차라 그런지 부스러기들이 좀 있어서 가루가 딸려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약간은 탁한 수색. 온도를 낮춰봐도 크게 차이 나질 않는 걸로 봐선 그냥 쿠키차 특징인 듯하다. 반쯤 소진하고부턴 그냥 다시백을 사용했는데 일반적인 소형 다시백에 8g을 넣으면 거의 꽉 차는 정도가 된다. 줄기가 가볍다 보니 물에 엄청 잘 뜨는 것도 특징. 우림시간이 길다면 가라앉을 텐데 짧은 우림시간 동안 어디는 물 위에 떠있어서 닿지 않고 어디는 물에 잠겨있어서 자꾸 신경이 쓰인다. 좀 넓은 다구를 써서 우리는게 정신건강에 좋을지도. 맛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던걸 보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신경이 많이 쓰인단 말이지.
한 모금 마셔보니 흔히 청향이라고 하는 푸릇한 맛이 도는 맛과 향이다. 시즈오카를 마시면 뭔가 이런 푸릇한 이미지가 있는데 깔끔하고 개운한 느낌의 약간 RTD스러운 이미지가 있다. 이게 줄기차에서도 그대로 느껴지니까 참 신기하기도 하고. 감칠맛이나 깊은 맛이 확실히 덜하긴 하지만 적당히 녹차스러움을 생각하면 이 정도가 편하게 마시기엔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여태 마셨던 다른 일본녹차들이 너무 진지했던 거 같기도. 가볍고 편하고 시원한 이미지의 차인 데다가 만드는 것도 훨씬 간편하다 보니 아무래도 인기가 있는 게 아닐까. 정량도 시간도 대충대충 해도 맛이 크게 차이 나질 않는다.
쿠키차는 보통 아이스티로도 많이 마시길래 시도해 본 아이스티. 냉침과 급랭의 차이가 크지 않아 급랭 위주로 마셨다. 가루가 좀 있으니까 다시백에 넣어서 간편하게 우려낸 뒤 얼음에 쏴악. 이것은, 여름에 반드시 쟁여놔야 하는 맛. 쿠키차와 얼음만 있다면 여름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따뜻하게 마실 때 이미 느꼈지만 시즈오카 녹차 특유의 시원하고 깔끔하고 상쾌하고 달달한 맛이 그대로 차갑게 정확히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냉녹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덖음 녹차의 그것과도 다르고 센차의 그것과도 다른데 아하 쿠키차가 딱 그 이미지였네. 아무튼 꿀떡꿀떡 잘도 넘어간다. 정신 차려보니 100g 봉지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사실 줄기차를 아예 안 마셔본 것은 아니고 시라오레도 마셔보고 그동안 마신 티백의 이것저것이 줄기위주의 차였던 적도 많은데 그때는 잘 의식하지 못했던 쿠키차의 매력을 이번에 정확히 느낀 것 같다. 이런 게 왜 순위권에 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매출순위만큼 정직한 게 또 어디 있을까. 딱히 무슨 마케팅을 막 하는 게 아닌데도 순위가 높다면 말모말모지. 다들 군말 없이 장바구니에 담는 상품은 나도 일단 담고 보는 게 맞다는 인생의 진리를 알게 해 준 시즈오카 쿠키차. 다음번 그랑마르쉐에 가면 두 개 담아 와야지 희희희. 한국은 차문화대전으로 한창 축제분위기인데 내년엔 차문화대전에서 너도나도 하나씩 담아 오는 강추템 위주로도 시음기를 한번 써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일본 로컬들이 매출로 알려준 추천템 시즈오카 쿠키차,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