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감님의 센차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지금입니다

루피시아 8572. 얼그레이 베르

by 미듐레어

올해는 온라인 그랑 마르쉐부터 시작해서 오사카 그랑 마르쉐까지 그동안 그렇게 소원이었던 그랑 마르쉐를 열심히 돌았는데 그래서 그랑 마르쉐 한정차 중에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어보면 콕 집어 뭐 하나를 이야기하기가 좀 곤란한 것 같다. 그런데 질문을 조금 바꿔서 의외로 좋았던걸 하나만 뽑아보라고 하면 주저 없이 고를 수 있는 게 있으니 바로 오늘 마셔볼 얼그레이 베르이다.

베르 시리즈는 루피시아의 흔한 작명 중 하나로 홍차로 나와있는 가향차를 녹차버전으로 낼 때 사용하는데 그러니까 얼그레이의 녹차버전이 되겠다. 사실 녹차에 베르가못을 더하는 건 생각 자체는 흔하게 하는데 의외로 성공사례가 적다. 너무 많은 사례가 있지만 옛날에 시음기를 썼던 루피시아의 오사카 한정 뱃핑상만해도 조금의 토핑이 더해진 얼그레이 센차였는데 정말 처치곤란이어서 마지막에 몇 그람 남은 건 대충 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평소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얼그레이 베르이기 때문에 2월의 온라인 그랑 마르쉐에서는 품목이 올라왔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이고 오사카 회장에서도 시음을 건너뛰려고 하고 있었다. 아내가 콕 찝어서 왜 이건 안 마셔보냐고 하기에 돌아보니 줄도 없어서 그냥 한번 마시고 지나갈 요량으로 마셔봤는데 어랏, 이거 왜 나쁘지 않지? 싶었다. 확인차 다시 마셔봐도 뱃핑상을 마셨을 때의 거부감이 없어서 아니 이게 왜 이렇지 싶어 딱 한 봉지만 장바구니에 넣어왔다. 너무 의외였어서 다음날 우메다에서 한정차를 살 때 뱃핑상을 원래는 살 마음이 없었다가 한 봉지 다시 구매하게 만들 정도로 어라 싶었던 차.

이후로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아이스티의 계절이 와서 이것저것 다 털어먹으면서 개봉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7월 온라인 그랑마르쉐에서 추가구매까지 한 얼그레이 베르. 오사카에서는 50g 봉입에 730엔이었고 7월 온라인 그랑 마르쉐에서는 780엔이었다. 각각 한 봉씩 구입했고 상미기한은 제조로부터 1년.

어-루구레이 베에-루

이번 그랑 마르쉐 특징이 캔입은 잘 팔지 않는다는 점. 예전 그랑마르쉐에선 캔입도 팔았던 거 같은데 올해는 캔입을 거의 못 봤다. 쁘띠캔 잔뜩 팔았던 것과 모모우롱 정도 일러스트 캔을 팔았던 것 같고 그랑 마르쉐 한정 블랜딩은 봉입으로만 팔았던 것 같다. 역시나 누가 말 안 하면 모를 디자인은 차별 없는 그랑 마르쉐 한정.

베루가못토노 코우키나 카오리오 마톳타 스가스가시이 후우미노 료쿠차데스. 사와야카나 아토아지와 아이스티이니모 사이테키.
베르가못의 고귀한 향기를 머금은 청량한 풍미의 녹차입니다. 상쾌한 뒷맛은 아이스티에도 최적.

홈페이지 소개에도 그렇게 나왔었고 회장에서도 냉침 권장이라고 크게 옆에다 써놨던 기억이 나는데 아무튼 아이스티로 적극 권장하고 있던 얼그레이 베르다. 실제 시음도 아이스로 진행했었다. 하지만 뒷 내용에 반전이 있음. 온도표시가 되어있는 걸로 보아 이것도 차맛이 꽤나 풍부한 고급 센차를 사용했을 것 같다. 올해 유독 열탕 아니고 온도 적힌 가향 센차를 많이 접하는 듯.

빤짝통통 센차

봉투를 열어보면 베르가못의 새콤한 향이 팟 하고 치고 올라오는데 청귤등의 시트러스 과즙향이 난다. 얼그레이 치고는 본격 시트러스라서 살짝 당황스럽달까. 다시 봉투를 살살 흔들면서 향을 맡아보니 꽤나 진한 베르가못향에 센차의 뽀얀 단내가 살짝 섞여 들어간다. 시트러스가 진한데도 휘발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신기한 부분. 건엽을 덜어내니 뺀질한 녹차가 역시 저품질의 녹차는 아닌 걸로 보인다. 건엽은 그야말로 심플한 센차 그 자체. 뱃핑상과 비교하자면 토핑이 빠진 대신에 센차특유의 분유 냄새 비슷한 단내가 좀 나고 베르가못도 이쪽이 조금 더 과즙 느낌의 향이다.

얼그레이답게 어떤 다식도 다 좋아

본격적으로 차를 우려 보았다. 얼그레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만큼 우선은 따뜻한 차를 한잔 마셔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6g의 차를 100도씨의 물 300ml에서 1.5분 우렸다. 예열해 둔 우림팟에 찻잎을 넣고 흔들어보니 찐 밤껍데기등에서 나는 향과도 비슷한 녹차의 고소한 향이 짙게 퍼져간다. 베르가못의 향이 덥혀진 녹찻잎의 향에 납작 엎드려버린다. 차를 우리 고나니 분유의 단내 같은 그 뽀얀 달달한 향이 귤을 쥐어짠듯한 싱그러운 베르가못향에 의해 증폭되는 느낌이다. 한 모금 마셔보면 혀 위에서는 녹차의 달고 고소한 맛이 느껴지고 베르가못의 향은 곧장 비강으로 솟구쳐서 양동작전을 편다. 얼핏 둘이 따로 노는 느낌도 들지만 주로 둥근팟을 썼을 때 그런 느낌이 종종 들었고 시보리다시 개완 같은 센차에 더 적합한 다구를 쓰면 오히려 베르가못이 조금 더 살아나면서 완전히 찻물에 녹아드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미리 하자면 개인적으로 따뜻하게 마시는 게 제일 좋았는데 다분히도 센차 자체의 맛이 좋아서 그걸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순서로 좋지 않았나 싶다.

센차가 좋으니 심플하게

이제 물의 양을 절반으로 줄여 우린 뒤에 얼음 가득한 컵에 따라 급랭을 만들어 보았다. 예열된 팟에 찻잎을 넣자 곧장 찐 밤을 으깨서 물에 갠듯한 향인지 분유의 향인지 아무튼 그 사이 어딘가의 달달 고소한 향이 퍼져나간다. 결국은 이 향이 따뜻한 물에 풀어져 목 넘김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게 최근 루피시아 센차에서 나는 달달고소한 맛과 향인데 매번 쓰면서도, 조금 전에 쓰고 또 쓰면서도 정확한 표현을 찾아낼 길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급랭을 위해 차를 우릴 때면 아무래도 더 진하게 우리다 보니 이 향이 훨씬 풍부하게 느껴지고 얼음에 따라낼 때까지도 느껴지는데 따로 모아둘 수 있다면 봉지에 담아두고 계속 맡고 싶은 향이다. 급랭의 맛은 여태 말한 그 고소한 차맛이 기분 좋은 목 넘김 내지는 물질감과 함께 느껴지고 찻물을 마시는 날숨과 들숨에서 기분 좋게 베르가못향이 사뿐 날아오른다.

냉침의 경우엔 5g의 찻잎을 500ml의 물에서 하룻밤 냉장고에 넣어두는데 부드러운 차맛에 비해서 베르가못의 향이 혀를 지나기 시작할 때부터 커다란 비눗방울처럼 퐁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향수탕의 느낌이 아니라 굉장히 고주파영역에서 돌고래 같은 고음이 한 번씩 치고 지나가는 느낌으로 가운데가 비어있는 듯한 베르가못향이 된다. 입안에서 토도독하고 터져버린 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 비눗방울이 떠오른 건데 제법 향이 강한 편이니 누군가에겐 좀 비누느낌이 날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을 적고 나서 하게 된다. 회사에서 출퇴근길에 냉침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편의상 하룻밤 냉침을 하긴 하는데 녹차 냉침이 너무 길어지면 쓴 풀 맛이 나니까 주의. 당장 마실 시간이 없다 싶은 경우엔 빈 병에다가 미리 걸러두기도 한다. 분명 냉침을 적극 권장하는 차인데 이상하게 내 취향에는 차맛을 진하게 살리는 쪽이 훨씬 좋았으니 다른 사람들의 입맛과는 다를 수도 있긴 하겠다.

한번 더 마셔도 될 것 같지만 처음의 감동은 없다

뱃핑상을 마셔봐도 예전과는 다르게 향수탕으로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변해버린 내 입맛을 최근 2년 사이에 빠르게 찾아가면서 안 그래도 무디던 입맛이 더 무뎌진 게 아닐지. 분명 얼그레이 베르보단 강한 베르가못이 느껴지고 차맛도 한번 헹궈낸 듯한 맛이지만 예전처럼 차맛은 전혀 없고 향수 같아 못 마시겠다는 감상은 아니긴 하다. 그러고 보면 뱃핑상을 따로 다시 시음기를 썼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이제서야 드는데 거의 다 마셔버려서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이래저래 뱃핑상은 억울하겠네.

오토소차였나 올 초에 마신 센차 베이스의 가향차부터 인 것 같은데 계속 이야기하는 뽀얀 단내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이전에는 잘 느끼지 못하던 루피시아의 센차 코어를 느끼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센차 우리는 테크닉이 점점 좋아진 건지 원인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올해 들어 갑자기 달고 고소한 맛이 강하게 느껴져서 꽤 많은 가향 센차들을 다룰 때 일부러 더 뜨거운 물에 우리 게 되고 아이스도 냉침보단 급랭으로 가게 된다. 여름이 되고 나름 녹차의 계절이 되었는데 아이스티를 마시느라 계절이 지나버렸다. 어찌 보면 다시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는 늦여름부터가 진짜일 수도 있겠지. 본격적인 센차의 계절을 즐길 수 있도록 센차 텐션을 확 끌어올려주었던 얼그레이 베르, 끗.

매거진의 이전글적당히가 없는 레몬수 유행으로 속 버리지 말고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