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642. 지유가오카 얼그레이
어느덧 초가을에 보부상님이 전달해 주신 행낭이 마지막 패키지인 루피시아 지유가오카 한정 4종 만을 남겨두었다. 루피시아 지유가오카점은 무려 '본점'으로 이곳의 점포 한정차는 루피시아의 일반적인 은색 캔이 아닌 토파즈인지 브론즈인지 하는 노오란빛이 도는 캔이다.
서양홍차 쪽으로 차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루피시아를 한번쯤 거치지 않을 수 없고 루피시아를 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와보고 싶어 하는 게 바로 지유가오카 본점이다. 규모와 시음공간등 한번 들어가면 팬이 되고야 만드는 그곳인데 다행히 나는 안가보고 보부상님께서 친절하게 한정 4종을 모두 보내주셨다. 언젠간 나도 가보고 싶다.
지유가오카 얼그레이를 먼저 열어보았다.
사와야카 나 베르가모또 니 카사나루 고쿠산 유쥬 노 고우키 나 카오리. 지유가오카 노 마치 니 후사와시이 키키 아루 얼그레이
상쾌한 베르가못 향과 어우러지는 국산 유자의 고귀한 향기. 지유가오카의 거리에 어울리는 기품 있는 얼그레이.
클래식한 얼그레이에 일본 유자의 향을 진하게 입혀 현대적인 도시 이미지에 어울리게 만들었나 보다. 그것이 바로 레이디 그레이 아니겠습니까? 얼그레이의 원조인 트와이닝에서 이미 진즉부터 시트러스 추가한 얼그레이를 내놓았으니 그 유명한 레이디 그레이 되시겠다. 워낙 유명하다 보니 비슷한 블랜딩이 회사마다 있는 것 같은데 루피시아에서도 본점 한정으로 시트러스 얼그레이를 넣으면서 제법 푸시해 주는 모양새이다. 꽤나 자신 있는 모양. 캔입 50g, 1150엔으로 상미기한은 1년으로 짧은 편이다.
개봉하자마자 나는 향은 생각보다 베르가못인데 다시 한번 깊게 들이켜면 시트러스의 향이 훅 치고 지나간다. 레이디 그레이와는 약간 다른 향. 레몬필과 유자의 차이인가. 유자는 설탕절임이라고 하는데 절임보단 드라이 유자필에 가깝다. 푸릇한 잎들이 있는데 다즐링인가. 상미기한이 1년이 더라니. 검은 차들이 좀 더 많은데 아마도 아쌈 블랜딩인 것 같다. 진짜 클래식한 얼그레이에 유자필만 들어간 의외로 단출한 구성이다.
5g, 300ml, 100도의 물로 2분간 우렸다. 기품 있는 수색. 역시나 레이디 그레이를 떠올리고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 우선 지유가오카는 확실히 유자 같은 밝은 노란색이 어울리고 레이디 그레이는 파란 수레국화 색이 어울린다. 지유가오카 쪽이 한 단계 톤업된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차에서 느껴지는 아로마 자체가 그러한데 다즐링 베이스 탓인가 싶은 느낌으로 톤업되어있다.
그런데 차의 무게감에서는 오히려 지유가오카쪽이 무거운 느낌인 게 유자의 산미가 슬쩍 침샘을 자극하면서 적잖은 수렴성과 함께 베르가못의 향조차 미들베이스에 가깝게 가라앉는다. 미들-하이 구간이 별로 없다가 갑자기 저 위쪽에서 유자가 상큼하게 안~뇽 짹짹하는 느낌. 그에 반에 레이디 그레이는 시트러스가 차분하고 베이스도 무난 무난 그야말로 단정한 레이디의 느낌이다. 지유가오카 얼그레이는 자유로우면서도 시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레이디 그레이가 또 아이스티로 그렇게 기가 맥히지. 지유가오카 얼그레이는 어떨지 한 번 만들어보았다. 10g, 300ml, 100도의 물에서 2분. 얼음 가득한 컵에 따라서 급랭하였다. 밝은 느낌의 산뜻한 향이 퍼져나간다. 꽤 진하게 탔음에도 수렴성이 많이 땡기진 않고 오히려 핫티보다 더 부드러운 느낌이다. 보통은 차갑게 마시면 어딘가가 가라앉기 마련인데 오히려 차가운 온도에서 더 붕붕 뜨는 느낌. 그렇다고 날아다니는 느낌은 아니고 그야말로 직선으로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홍차라는 느낌이다. 다즐링의 힘인 건가. 설탕을 슬쩍 녹여줬어도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이미 다 마신 뒤였다. 쉽고 향긋하게 잘 넘어가는 게 얼그레이가 부담스러운 사람도 편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엽저를 보니 잎이 생각보다 많이 잘다. 그래서인지 침출시간도 짧은 편인데 그럼에도 묵직한 티가 잘 버텨주는 좋은 차였다. 뒷여운까지 생각해 보면 얼그레이 가향과 유자의 조화가 요란스럽지 않게 잘 어우러졌고 거기에 끝까지 왜곡이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베이스 티의 조절이 아주 훌륭했다. 다만 2회 추출은 쉽지가 않았는데 가격을 생각해서 끝까지 뽑아마시게 되는 부분이 좀 아쉬웠다. 가격면에서나 취급면에서 까다로운 편에 속하지만 기억에 강하게 남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망설여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묘하게 계속해서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 추천은 어렵지만 재구매는 할 것 같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클래식함과 세련됨이 동시에 돋보인 지유가오카 얼그레이 었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