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듐레어 May 29. 2024

조금은 평범했던 싱가포르의 마술피리

TWG, T6035. MAGIC FLUTE TEA

첫 TWG 소개에 앞서 내가 가지고 있는 TWG에 대한 생각을 잠시 이야기해 본다. 일단 트와이닝과 다른 회사이고 영국회사 아니고 오래된 회사가 아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회사명은 트와이닝과 자연스럽게 연관되도록, 그리고 디자인이나 컨셉은 대놓고 마리아쥬 프레르에서 따온 싱가포르의 신생기업인데 나쁘지 않은, 동양에선 이보다 잘하기 어려울 정도의 퀄리티로 사람 헷갈리게 하는 회사다. 한마디로 상도덕은 좀 부족하지만 맛은 충분한 TWG 되시겠다. 홍차계의 로키 포지션이랄까. 그래서 나는 언제나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에서는 투썸과의 제휴로 접근성이 왓따이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인 몇 종류의 블랜딩은 아주 쉽게 구할 수 있기도 해서 어쨌든 시장을 늘려주는 역할을 잘하고 있으니 마냥 미워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맛있어서 종종 먹기도 하고. 한국 시장이 워낙 작고 관세문제 등으로 몇 종 안 들여와서 그렇지 외국에서 종종 만나는 TWG 매장을 가면 수십 개가 넘는 블랜딩을 전시해 놓고 판매하고 있어서 언젠가는 TWG도 한번 털어봐야겠다 종종 생각해 왔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일본의 한 빌딩에서 TWG 매장을 만나고 말아서 그 자리에서 한 15개쯤 시향하고 6개의 차를 사 왔다. 전부터 궁금했던 차들을 딱딱 찍었는데 하필 다 매진이어서 랜덤으로 그냥 다 시향 해가면서 고를 수밖에 없었다. 점원도 나도 힘든 시간. 많이 민망하기도 했다.


좀 길었는데 요약하면 애증의 TWG에서 쇼핑 좀 했고 오늘 마셔볼 차는 매직플룻, 그러니까 마술피리 되시겠다. 이름이 특이해서 골랐는데 어떤 차인지 설명해 주면서 “시트러스 그런 거.. 음.. 뭐랄까..” 하는데 시향 딱 해보니 너무나도 베르가못이어서 “베르가못? 얼그레이 말하고 싶은 거야?”라고 했더니 아주 환하게 점원이 웃어주었던 바로 그 차. 홈페이지 설명에도 베르가못이나 얼그레이등의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걸로 보아 매직플룻을 설명할 때 베르가못을 언급하는 게 약간 금기인 느낌이다. 직원분이 베르가못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느낌은 아니었어서. 아무튼 고주그라므 옷케이 해서 포장해 왔고 50g, 1300엔.

매직 플룻 티

‘마술피리’하면 당연히 모짜르트의 그 마술피리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라떼는 마적이라고 불렀는데.. 아무튼 밤에 마시면 조수미 선생님의 아리아가 들릴 것 같은 네이밍. 실제로 모짜르트의 마술피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블랜딩이라고 하며 엑조틱한 레드베리와 풍부한 홍차의 조화가 아주 일품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숨겨진 메인 재료인 시트러스와 베르가못을 조합해 보면 그 결과물이 마술피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잘 공감이 되진 않는다. 뭐 맛만 좋으면 되는 거니까 일단 마셔보자. 오-픈.

베리류와 시트러스 껍질이 잔뜩 들었다

앞에서 미리 이야기가 나와버렸지만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봉투를 개봉하면 나는 향은 그냥 상큼한 얼그레이 정도 된다. 이렇게 평범한 블랜딩을 왜 골랐느냐 하면 알고 있는 어떤 차와 너무 비슷한 향이 났기 때문인데 그것은 잠시 후에 공개. 건엽을 살펴보면 새까만 브로큰 리프 사이로 꽤나 큼직하게 과육들이 들어있다. 점점이 박혀있는 씨앗의 모양을 딱 봐도 이것은 딸기겠구나 싶다. 레드 베리.. 딸기군요. 그 주변에 좀 더 딱딱해 보이는 토핑들도 있는데 아마도 레몬필이 아닐까 싶다. 오렌지필보단 좀 더 잘고 딱딱해 보인다. 어쨌든 알고 있던 설명과 일치하는 토핑구성이다.

얼그레이 정도 생각하고 페어링하면 얼추 잘 어울린다

6g, 300ml, 100 도의 물에서 2.5분 우렸다. TWG 레시피는 95도 3분 이상으로 되어있는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100도 표기가 부담스러워 95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부분의 홍차는 팔팔 끓는 물을 부어주도록 하자. 찻물을 서빙해 보면 묘하게 한약방 감초향이 수면 위에 굼실굼실 떠다니는 느낌인데 베르가못이 굉장히 진할 때의 스모키 함 보다는 말 그대로 묘하게 한약방의 감초향 같은 뉘앙스가 있다. 넓은 잔보다는 머그컵처럼 깊은 잔에 따르면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마셔보면 시향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도 익숙한 맛과 향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트와이닝의 레이디 그레이. 트와이닝 레이디 그레이와 얼그레이의 딱 중간 어디 느낌이다. 레이디 그레이가 노란색, 파란색 신데렐라 드레스를 입은 느낌이라면 매직플룻은 어둠의 신데렐라, 깜장 드레스를 입은 말레피센트 같은 느낌이랄까. 첫인상이 너무 레이디 그레이의 그것이어서 웃음이 터졌다가도 마실수록 절묘한 포지션에서 오는 고혹적인 매력이 조금은 섹시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뭐 이리 존재감이 없나 우습게 봤던 레드 베리는 베르가못과 시트러스의 익숙한 조합에서 약간의 디스토션 같은 짜글짜글한 노이즈처럼 끼어들면서 본인의 공간을 창출해 낸다. 총평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허투루 만든 블랜딩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

베리류도 시트러스도 우리고나면 많이 녹아서 뭉그러진다

섬세하게 뜯어보았을 때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건 마냥 좋은 평가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얼핏 보면 뭐가 좋은지 알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고 알아본들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특별함이 아니라면 조금 다른 베리에이션 정도로 인정받는 선에서 그치고 마니까. 벌크팩 단가를 고려해 보면 평가는 더더욱 박해질 수밖에 없다. TWG에 대한 애증은 또 이렇게 깊어져간다. 타미노 왕자를 이끌어주던 마술피리의 신비로운 소리를 떠올리기엔 조금은 평범했던 매직플룻이었다. 끗.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의 추위 속에서 한땀 한땀 그러모은 향긋한 봄의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