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듐레어 May 27. 2024

겨울의 추위 속에서 한땀 한땀 그러모은 향긋한 봄의 차

루피시아 1869. 카일베타 윈터프로스트 2024

작년 이맘때 보부상님을 통해 얻어보려 하였으나 실패했던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닐기리 윈터프로스트. 인도의 주요 차 생산지인 아쌈과 다즐링이 북쪽이라면 남인도에는 닐기리라는 지역이 주요 차 생산지로 유명하다. 예전엔 닐기리라고 하면 뭔가 마니악한 느낌이 있었는데 요즘은 싱글 이스테이트 중심으로 고급화가 많이 된 느낌이다. 아무래도 남인도라서 그런지 여기도 한겨울이 첫물차의 느낌인데 다즐링으로 따지자면 퍼스트 플러시가 닐기리에선 윈터가 되시겠다. 평소에도 닐기리를 즐겨 마시는 터라 작년에 너무 늦게 구매를 시도하게 못내 아쉬웠는데 올해는 일정이 어떻게 잘 맞아서 구해왔다. (매장에서 판매 중인 닐기리 햇차는 하나씩 다 구해오긴 했다.)  카일베타 다원은 앞서 말한 닐기리 고급화에 앞장서는 다원 중 하나로 오소독스한 방법을 통해 닐기리 홍차를 생산 중인 다원이다. 아쌈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더 많은 비율로 닐기리는 기계를 통해 CTC나 더스트 형태로 만들어져 티백 내지는 블랜딩에 쓰곤 하는데 예전엔 아쌈도 아닌 것이 실론도 아니다 싶으면 닐기리였을 정도로 흔하게 쓰이다가 최근엔 카일베타 같은 다원 중심으로 닐기리 자체의 고급진 맛을 포지셔닝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고오오오급 닐기리 50g 봉입으로 무려 2000엔, 상미기한은 2년짜리를 구매 완료.

드디어 만났네 윈터 프로스트

제법 스페셜해 보이는 라벨에 인도. 닐기리라고 원산지가 적혀있다. 고급고급이라 그런지 봉투도 라지. 정말 설렌다.

모기타테 노 오렌지 오 오모와세루 후렛-슈 나 후미, 후로라루 데 아마이 요인. 사무사 가 하구쿠무 고쿠조 노 슌 노 니루기리 코차.
갓 따낸 오렌지를 떠올리게 하는 신선한 풍미, 꽃 향기처럼 달콤한 여운. 추위가 기른 극상의 제철 닐기리 홍차.

이름 그대로 된서리를 맞거나 맞을뻔하며 자란 닐기리 홍차. 와인도 이른 눈을 맞고 얼어버린 포도로 만든 아이스와인이 참 달고 맛있는데 적도의 겨울을 품은 닐기리가 기대가 된다. 게다가….. 물 온도에 숫자가 적혀있다! 보통은 열탕이라고 해놓고 끝나는데 무려 85~90이라는 꽤나 구체적인 온도가 명시되어있다. 이건 정말 감동인데. 경험상 온도가 조금 더 높아도 큰 차이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얼마나 신경 써서 판매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오소독스한 홀리프

봉투를 열어서 향을 맡아보자 닐기리 특유의 쌉싸래한 향이 사악 도는데 은근히 꼬소한 향이 같이 맴돈다. 흔히 녹차에서나 날법한 고소한 향이다. 이쯤 되니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가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분명 닐기리와 다즐링은 다른 카테고리인데 첫물차의 느낌에서 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 건엽을 꺼내서 살펴보니 정말 오랫만에 보는 길쭉길쭉한 롤링이다. 아아… 이것은… 홀리프였습니까? 거기까진 모르고 샀던지라 내심 감동했다. 우래옥에서 당당하게 불고기 시켜 먹는 기분이랄까. 이제 저도 꽤 어른이라구요. 자태가 영롱하여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하므로 일단 우려내보도록 해야겠다. 홀리프를 오랫만에 보니까 중국홍차 같단 생각이 좀 드는데 확실히 대엽종이라 그런지 잎이 조금 더 긴 느낌이다. 그냥 느낌만 그렇고 암튼 빨리 먹고 싶네.

고오급 홍차와 성의가 부족한 티푸드

6g, 300ml, 90도 아래의 물에서 2.5분 우려내었다. 이렇게 한 김 식혀서 우려야 달달한 풍미가 살아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큰 차이는 없고 어차피 그냥 맛있다. 수색은 홍차라고 하기엔 굉장히 노오오란 느낌인데 사진상으론 잘 확인이 안 된다. 서빙팟에 옮길 때부터 닐기리향이 굉장히 짙게 다가온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꽤나 무거운 느낌으로 티팟 주변에 깔려간다. 이런 고풍스러운 느낌이 닐기리의 매력이고 내가 닐기리를 좋아하는 이유인데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그 부분이 도드라진다. 한 모금 마셔보면 쌉싸름한 풀향이었던 닐기리향이 민트향처럼 시원하게 비강까지 차오르고 그 뒤로 은은한 꽃향이 살포시 불어온다. 혀끝에 남는 회감이 제법 달달한데 전반적으로 동방미인 같은 우롱차의 느낌과 다즐링의 풋풋함과 실론의 민트향이 적절히 섞여있는 닐기리만의 청량함에 회감까지 살짝 감기는 형국이다. 익히 알던 그 닐기리인데 확실히 고급스러운 느낌. 약간의 시트러스 한 뉘앙스도 닐기리 그 잡채다.

닐기리는 아이스티를 만들기에 너무 좋은 차라서 재탕으로는 항상 물을 절반 안되게 넣어 급랭을 마시곤 한다. 향에서 약간의 날이 서있는 반면 수렴성은 있으나 눈치채기 어려운 느낌으로 순해서 급랭에서도 아주 좋은 맛을 내어준다.

엽저가 녹차스럽기도 우롱차스럽기도 하다

카일베타 윈터프로스트는 오랫만에 홍차를 마시는 설렘을 되찾아준 스페셜티 었다. 되도록 스트레이트로만 마셔달라는 홈페이지의 안내사항이 아니더라도 한번 스트레이트로 마셔보니 다른 방법이 필요가 없는, 맛과 향이 가득한 차였다.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가장 먼저 완성된, 겨울을 품은 닐기리 윈터 프로스트. 그 누구보다도 한 발 앞서 봄을 준비한듯한 향긋한 봄의 홍차였다. 카일베타 닐기리 윈터프로스트, 끗.

매거진의 이전글 친구는 오랜 친구 죽마고우 국민가향 사쿠람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