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정확히

마음속 신호등에 불이 켜진다면

by 은소리

여름이 오는 늦봄, 저녁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한가득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그 해 1월에 결혼한 언니의 전화였는데, 형부와 명동에 있으니 잠시 나오라고 했다. 그 상태로 집으로 들어가기엔 뭔가 서운한 마음이었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언니랑 형부를 만나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학업에 대한 억압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내 몸뚱이보다 큰 가방에 구겨 넣은 책들과 함께 명동으로 향했다.


명동 스타벅스엔 난생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언니랑 형부에게 인사하면서 돌아본 테이블에 왠 낯선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젠장, 오늘 정말 후줄근한데. 하필 이럴 때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게 될 줄이야.' 대학원에 다닐 때 여러 번 소개팅을 했더랬다. 선배와 친구의 소개에 소개팅을 나갔었는데, 그때마다 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개팅의 날짜와 장소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선자는 미리 소개해 줄 두 사람의 번호를 교환시켜주었고, 만나기 전부터 카톡으로 서로의 신상을 주고받았었다. 그렇게 소개팅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준비된 상태, 즉 낯선 이를 만나기 좋은 상태로 나갔던 것이다. 결과야 어떻든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상태로 나갈 수 있었다는 게 중요했다. "언니, 누구야?" 낯선 이를 경계하며 묻는 질문에 언니는"너 소개해 주려고 불렀지."라고 대답했다. 아뿔싸, 그 날은 꾀죄죄함의 극치였다.


그 날 아침은 다른 날보다 피곤했었다. 전날 벗어놓은 청바지와 즐겨 입는 니트를 입고 집 밖을 나섰더랬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야 할 책 목록을 확인하고 밤이 되기도 전에 피곤했다. 당연히 화장은 하지 않았고, 머리라도 감은 게 참 다행이었다. 수업이 일찍 끝났는데 집으로 바로 돌아갈 수 없었다. 논문을 준비하는 기간이어서, 도서관에서 미리 찾아본 책의 목차만 봤는데도 완벽히 지쳤었다. 옷차림은 둘째치고 얼굴도 피곤으로 물들었을게다. 세상에 그런 모습을 소개팅 남자에게 보이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을까. 언니와 형부를 욕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세상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잽싸게 언니를 째려보며 말했다. "갑자기 이런 소개팅이 어디 있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눌 때, 이미 나는 졌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날이었다. 바리톤이 전공이라는 그는 목소리가 좋았고, 시원시원한 눈매와 듬직한 체격이 참 좋았다. 호리호리한 스타일보다 커다란 곰 같은 체형을 선호했는데 그가 딱 그러했다. 첫눈에 반한 남자 앞에서 나는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필 꾀죄죄하고, 얼굴은 피곤하며, 화장도 하지 않았고, 며칠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말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자꾸 웃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잘하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스타일이다. 그런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 그와 눈을 맞추고 웃으며 반응을 해주었다.


아무리 방긋방긋 웃더라도, 내게도 필살기가 필요했다. '나는 지금 너에게 관심이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내 마음을 그가 알아챌 수 있도록 정확한 필살기 한 방이 필요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와 단 둘이 간 카페에서 그는 보온병에 담긴 모과차를 내밀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보온병에 담긴 차를 마시라고?' 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천천히 보온병을 돌렸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제발 그가 되었다고, 그냥 마시지 않아도 된다고 하기를 바라면서. 정말 천천히 보온병을 돌리며 "정말 마셔요? 내가 마셔도 돼요?"라고 물었는데, 그는 한결같이 대답했다. "네, 마셔봐요." 뚜껑을 열고 차의 향을 맡아 정체를 확인했다. '정말 차가 맞긴 하구나.' 살짝 목을 축이고 얼른 그에게 내밀었다. 그도 내게 웃어 보였지만 이것으로는 역시 부족하다 싶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그 날은 그의 어머니 생신이라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야기 해준 그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돌아가서도 이야기해주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지하철을 향해 걷는 길목에서 나는 계속 두리번거렸다.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나를 눈치챈 그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왜요?" 못 이기는 척 그에게 대답했다. "어머니께 드릴 선물이 뭐가 좋을지 찾고 있어요." 그는 매우 깜짝 놀랐는데, 나는 최대한 태평하게 이야기했다. "어머니 생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뭐라도 선물해 드리고 싶어서요. 부담 갖지 말고 받으세요." 다행히 올리브영을 찾았고, 그곳에서 적당한 가격의 핸드크림을 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의 필살기가 그에게 과했던 모양이었다. 낯선 여자가 자신의 엄마의 생신 선물을 챙겨주다니, 이게 정상인가 싶었다고 했다. 너무 적극적으로 비쳐서 정말 괜찮은 사람인가 싶었다고도 했다. 낯선 여자의 적극적인 들이댐이 얼마나 이상하게 비쳤을까 싶지만, 다시 돌아간대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그 날의 그는 참 반짝였고 따뜻했다. 처음 보는 관계에서 내가 그를 얼마나 알까 싶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나는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요'를 알리고 싶었다. 필살기는 적중했고,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