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말이야

네가 엄마를 자라게 하는 거야

by 은소리

엄마가 된 이후 뒤늦은 꿈을 찾기 위해 교육대학원에 입학했었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공부하는 업을 가지려고 했었는데, 결혼하고 보니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엉덩이가 무겁지도 않았고, 동기들처럼 기발하게 논문을 잘 쓰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계속 공부를 지속하기엔 건강이 악화되었고 돈이 없었다. 궁색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시작했던 학원 강사를 계속 전전했고, 첫째 아이를 임신할 무렵 학원을 그만두고 과외를 시작했다. 스무 살 때부터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다 보니 내 안에 욕심이 생겼더랬다. 이렇게 학원에서, 과외로 아이들을 가르칠 거라면 교육대학원에 가는 게 낫겠다고.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했을 때 첫째 아이는 겨우 만 8개월이었다. 아직 젖을 떼지도 못한 아이를 떼어놓고 부지런히 학교에 다녔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학교 앞으로 왔더랬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그렇게 교육대학원 시절을 마쳤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남편의 일로 갑작스럽게 부산으로 이사를 떠나게 되었고, 나는 임용시험을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우리가 부산에서 평생 살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참으로 좋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교생시절의 기억이 나를 주춤거리게 했다.


교육대학원 4학기 즈음 한 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라면 이미 이골이 나있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첫 수업의 긴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나의 긴장은 내가 멀미를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 어떤 종류의 차를 타도 멀미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멀미를 할 때는 '임신'이었다. 첫째 아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로 미루어보고 교생실습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검사를 해보았다. 선명하고 명확한 두 줄, 나는 그렇게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하지만 나의 임신은 교생실습을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아무리 학교에서 배려를 한다고 해도 나의 출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맡겨진 반도 있었고, 정해진 수업 스케줄도 있었다. 그나마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는 교생 담당 선생님께서 배려해주셨기에 시험감독은 앉아서 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밥을 든든하게 먹고 출근을 했다. 본래 아침을 먹지 않는 편이었는데, 둘째를 임신했을 때는 밥맛이 참 좋았다. 학교에서 먹는 급식도 맛있었고, 집에 돌아와 수업 준비를 하며 먹었던 저녁도 참 맛있었다. 아기 집 안에 보석처럼 반짝여야 하는 아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말이다. 임신 4주 이후에는 동그란 아기집 안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아기가 보여야 한다. 그 이후에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아이의 커가는 모습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둘째는 그 안에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아침을 먹지 않았다.


교생 실습을 다 마칠 때까지 수술을 하러 가지 않았다. 뱃속에 텅 빈 아기집을 안고 실습을 마쳤다. 유산되었다는 사실도 다 마친 뒤에 말씀드렸고, 남편을 붙들고 펑펑 울었다. 내 욕심 때문에 아기를 볼 수 없게된 것만 같았다.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을 하자고 했지만, 자연스럽게 아기집이 나가길 기다리고 싶었다. 결국 중절 수술을 하고 난 뒤에도, 내 안에 녀석은 오랫동안 반짝였다. 부산으로 이사 가기 전에 지금의 둘째, 실은 셋째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아이를 임신했음에도 나는 계속 하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아이를 잃을 수는 없는데, 나는 두렵고 무서웠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산모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들, '유산방지 주사, 임당, 뇌실'은 기본이고 아기집 안에 가느다란 막이 있었다. 초음파를 할 때마다 그 막에 아기의 손이나 발이 닿지는 않을까 늘 마음을 졸였다. 사실 이 아이를 임신한 초기에 나는 많이 두려웠고 무서웠기 때문에 기쁨이 별로 없었다. 하혈을 하는 한 달여 동안 이사 간 그 집에서 나는 바닥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을수록 또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어쩌면 나는 계속 텅 빈 아기집에 묶여 있었던 것 같다. 이 아이를 임신한 지 4개월 이후가 되어서야, 그제서야 나는 겨우 텅 빈 아기집을 마음에서 떠나보내게 되었다. 애초에 생기지도 않은 아이였지만 내 안에 아주 오랫동안 반짝였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둘째가 되었다. 엄마 보란 듯이 장난꾸러기로 자라나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내 안에 가득했던 슬픔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이 다 내 탓인 것만 같았던 그때, 고작 내 안에 아이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있을 때, 아이는 잘 자라주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기억을 붙잡고 슬퍼하던 내게 아이는 미래가 되어 주었다. 어쩌면 엄마라는 사람은 아이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닐까. 아이의 존재가 엄마를 있게 하고, 그의 미래가 엄마의 행복이 되리라는 것을 알까. 모든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건져내어 내게 엄마 내음을 찾는 아이에게 나는 비로소 '엄마'로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