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진짜 마음은 포장해도 드러나거든요

by 은소리

학창 시절 넉넉지 않은 환경과 작은 키, 잦은 이사로 따돌림을 당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 두 세 차례 이사와 전학을 경험했더니 모르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는 것이 내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맛있는 반찬을 싸간 것도 아니었고, 친구들을 주도해서 놀만큼 배짱이 좋지도 않았었다. 초등학교 오 학년 즈음, 임시 담임 선생님께서 유독 나를 예뻐해 주셨다. 일 학년 때부터 그때까지 선생님의 칭찬과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귀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곧 그만두셔야 했고, 바로 원래의 담임 선생님이 오셨다. 임시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게 주고 싶다시며 크레파스를 선생님 책상 서랍에 넣겠다고 하셨다. 담임 선생님이 오시면 말씀드리고 받아가라고 하셨었는데, 나는 금방 여느 그 또래 아이들처럼 그 말을 잊어버렸다. 하루는 담임선생님께서 매우 화가 나셔서 들어오셨다. 나를 교실 앞으로 불러 세우시더니, 크레파스를 꺼내시며 화를 내셨다. "너는 네가 직접 달라고도 말 못 하니?"라는 말과 함께 크레파스는 내 머리에 던지셨다. 영문도 모른 채 크레파스로 머리를 맞았고, 머리띠가 부러졌다. 반 아이들 전체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이전 담임선생님의 말로 화가 나셨고, 나는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크레파스를 주워 들고 엉엉 울었지만 그런 나를 달래주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일을 집 안에서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결혼한 뒤, 남편에게 "생각해보니까 나 이런 일도 있었어."라고 더듬거리며 말했을 뿐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오 학년 아이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에게 이야기하면서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날의 나는 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걸까. 내가 크레파스를 선물로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반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크레파스로 맞을 만큼 잘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기억을 더듬거리며 꺼낸 내 마음은 억울하고 속상하고 분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또다시 전학을 갈 때까지 누구 하나 먼저 다가온 아이가 없었다. 당시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은 또 한 번의 이사를 했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을 다른 학교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곳은 더 이상 나를 둘러싼 소문이 없었다.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고, 나를 미워하는 선생님도 더 이상 없었다.


누군가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잘못하지 않아도, 실수하지 않아도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 '싫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존재 자체가 원인이 되지는 않았겠으나, 내 존재로 하여금 불거진 사건이 싫었기 때문에 결국은 내가 싫어지게 되는 것이다. 나의 첫 경험은 연장자였고, 권위자였다. 내가 반항하거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에 더 처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의 나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울며 호소했어야 했다. 이유 없이 선생님께 맞았다고, 반 아이들이 다 지켜보는 데 내게 크레파스를 던졌다고 말했어야 했다. 엄마는 선생님을 찾아갔어야 했고, 선생님은 나에게 사과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그 분노를 고스란히 받았다. 그 날의 경험은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그 이후로 몇 차례 다른 권위자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나, 발이 묶인 코끼리처럼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줄 모르는 바보가 되었었다.


엄마가 되니 내 아이들이 나처럼 크는 것이 두려워졌다. 나와 같은 일을 경험했을 때, 나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기만 하면 어쩌나. 엄마가 된 뒤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어주기만 했는데, 조건 없는 미움을 경험하게 되는 그 날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존재만으로 너는 사랑스럽고 빛이 난다고 날마다 이야기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그 누군가 아이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면 어쩌나. 온갖 거짓말로 '너는 쓸데없고 필요 없어.'라며 아이의 밭을 휘저어버리면 어쩌나. 무너진 사랑의 터를 되새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두려움이 커져만 갔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지만, 다시 밭을 가꾸고 물이 흐르게 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무너진 것도 모른 채 '내가 뭐, 원래 이 모양이지.'라고 거짓을 받아들이던 순간도 있었다.


그 날이 오면, 아이가 까닭 없는 미움을 한가득 짊어지고 오는 날이 오면 크레파스 사건을 이야기 해야겠다. 엄마도 고작 열두 살에 그런 일을 겪었다고, 그렇지만 엄마는 잘못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누구나 이유 없이 미움을 당할 때가 있는데 그 일에 너 자신이 통째로 흔들리도록 두지 말라고 이야기해야겠다. 엄마는 그때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나의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너는 이렇게 엄마에게 이야기하니 엄마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 아니냐고. 너를 싫어하는 몇몇의 눈 때문에 힘들기를 선택하지 말고, 너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을 바라보라고. 그 사람들이 언제든 너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고 방패가 되어줄 테니, 필요하면 언제든 그 뒤에 숨어도 겁쟁이가 되는 게 아니라고, 그게 끝은 아니라고 말이다.


때때로 이유 없는 미움은 정말 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자격지심, 솟구치는 분노에 그야말로 재수없이 걸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날의 선생님과 같은 나잇대가 된 나는 그때로 돌아가 교무실에서 나서는 선생님을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 어떤 아이도 당신의 자존심보다 작지 않아요."라고. 그리고 교실에 들러 우는 아이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걱정하지마, 너 때문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