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한 의도
최근 마음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꾸 돌아보게 되는 것이 마음이라서 그랬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과 행동이 아직 어린 너에게 비수가 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서 그랬다. 나의 어린 시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쉽게 영향받고 흔들렸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 '마음'은 깊고 깊은 우물이 되었다가, 넓디 너른 초원이 되기도 했다. 어둡고 캄캄한 터널과 같다가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무지개가 뜨기도 했다. 마음은 그 어떤 계절보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가졌다. 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까 봐 걱정할수록 미로는 더욱 깊어져 갔다. 더불어 나의 걱정과 불안이 고스란히 또 너에게 전가될까 두려운 마음이 스멀스멀 싹이 났다. 이대로 가다간 제 명에 죽지 못할 것만 같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멀고 험난한 계곡을 넘어가면 높은 벼랑 끝에 흔들 다리가 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흔들 다리를 한 발씩 건너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아 무섭다. 그럼에도 한 발씩 내딛다 보면, 결국 다리를 다 건너게 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무렵, 눈앞에 또 다른 산을 맞닥뜨리게 된다. 내게 너의 마음을 향해 가는 길이 꼭 이러하다. 너의 마음을 향해 최대한 조심해서 한 발씩 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혹은 조심해서 가야 하는 길이 지금의 길 뿐이 아니라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아, 대체 부모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 번의 실수로 아이의 인생이 온통 망가지는 건 아닐 텐데, 이 엄청난 부담감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 걸까? 아이가 행복해하지 않을 때, 아이가 인생의 험난한 길에 서 있게 될 때, 부모라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곁에 있어줘야 할까?
도대체 찾을 수 없는 미로 찾기 같은 너의 마음은 그만두고, 대체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하기로 했다. 고작 여덟 살인 아이 앞에서 열여덟, 스물여덟, 서른여덟의 인생까지 걱정하는 걸까? 나의 불안지수가 다른 부모들에 비해 너무 큰 건 아닐까?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과한 건 아닐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갈 무렵, '너의 어두움'이 '내 탓'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의 아픔'이 '내 탓'이 되는 것이 싫었다. '너의 슬픔'과 '너의 고통' 속에서 내가 원인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안에 가득했다.
책임감이 크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통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든지, 내가 너의 문제의 씨앗으로 낙인찍히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너의 슬픔과 고통을 마주할 힘이 없어서, 힘든 길로 들어서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너의 가림막이 되어줄 수 있을까? 내가 언제까지 너의 인생길에 표지판 노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두려움을 피하려고 너의 슬픔과 고통까지 제한한 것이다. 너의 인생의 고통에서 원인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의 아픔을 너의 탓으로 잘못을 돌리고 나면 처음엔 속이 좀 후련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잊을만하면 생겨나는 또 다른 고통의 문제에서 '직면'하고 맞서지 않으면, 결국 도돌이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다음부터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고통과 부딪힌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를 뛰어넘게 될 은혜를 만나게 될 거다. 너의 회복 탄력성은 그렇게 조금씩 자라나게 되리라.
나의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한 너의 마음 찾기는 그만둬야겠다. 너의 마음을 향한 나의 발걸음은 애초에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직면'하며 맞서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삶의 모든 순간이 맑기만 한다면, 마음의 정원에 자라난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나와 너의 마음에 각자에게 맡겨진 열매들이 자라나길 기도한다. 서로의 정원에서 열매를 가꾸고, 따먹으며 함께 서서 자라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