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생활의 첫 시작 LA 공항에서 부터, 우리 가족의 집을 구하기
이민 생활의 첫 시작은 LA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시작되었다.
대머리 백인 입국 심사관 앞에 선 나는 심판의 줄에 선 죄인처럼 숨 막히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Where are you going?", "What are you going to do?" 서툰 영어와 눈치만으로 겨우 대답을 이어갔다.
그의 심드렁한 표정과 질문 하나하나가 내 심장을 옥죄어오는 듯했다. 그 짧은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마치 내 인생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왔다'는 희망과 '여기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이는 순간. 마침내 영사관이 여권에 '쿵' 하고 도장을 찍어주었을 때, 쿵 하는 소리가 온몸에 울리는 순간, 나는 짓눌려 있던 숨을 비로소 토해냈다. 그 둔탁하고도 경쾌한 소리가 그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고 우리는 미리 연락해 둔 지인의 집으로 향했다. 비자 문제로 인해 집과 살림살이를 모두 정리한 우리는, 여섯 개의 거대한 캐리어를 든 채 방 한 칸을 빌려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야 했다.
낯선 사람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 하루하루가 불편했고, 우리는 조심 또 조심하며 지냈다.
가장 시급했던 것은 우리 가족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집 구하기는 예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미국에서 살아온 기록인 '크레딧(Credit)'이 없다는 이유로, 어떤 아파트 매니져도 우리에게 집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크레딧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우리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국에서는 제법 괜찮은 회사에 다니는 능력 있는 팀장이었지만, 이곳에서는 '크레딧' 없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무엇보다 은행 계좌 개설도 급선무였다. 당시에는 온라인 개설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직접 은행 창구에 줄을 서서 대면으로 개설해야만 했다. 아파트 렌트비와 각종 공과금을 '개인 수표(Check)'라는 원시적인 방식으로 내야 했으니, 은행 계좌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때 누군가 한국 교회에 부탁해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안면몰수하고 한인 교회에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나의 간절함에 한 교인이 관심을 보였고, 다행히도 그분의 지인이 아파트 관리인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낯선 땅에서 만난 그분의 따뜻한 손길은 우리에게 단순한 도움을 넘어, 낯선 곳에서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그분의 도움으로 우리는 멕시코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 흔히 말하는 빈민가에 위치한 낡은 아파트를 계약할 수 있었다.
3층짜리 건물 꼭대기 층이었다. 집 안은 늘 후텁지근했고, 밖은 하루 종일 멕시코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창문 밖으로 매콤한 향신료 냄새가 흘러들어 오고, 길거리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놀았다.
그래도 나는 마냥 좋았다. 3개월 만에 우리 가족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여섯 개의 커다란 가방을 바라보며 나는 안도했다. 이 가방들조차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3개월 동안 난파된 배처럼 떠돌던 우리 가족이 마침내 닿은 작은 섬이었다.
이 모든 것을 3개월 만에 해낸 것이 기특했고, 옆에서 묵묵히 버텨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정착에는 집만으로는 부족했다. 캘리포니아는 자동차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국제운전면허증은 임시용일 뿐, 새로운 운전면허를 취득해야만 했다.
필기시험을 두 번 만에 겨우 통과했고, 실기 시험도 두 번 만에 합격했다. 그시절 한국에서는 코스 시험만 있었기에, 미국에서 시험관이 옆에 앉아 방향을 지시하는 방식이 무척 당혹스러웠다.
시험관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 좌회전 신호에서 우회전을 했을 때는 정말이지 창피했다. 두 번째 시도 끝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부끄러움보다는 자랑스러움이 더 크게 밀려왔다.
운전면허를 따자마자 우리는 다시 교회 교인들에게 수소문해 중고차를 구했다. 혼다 시빅 1998년형.
내구성이 좋다는 조언에 따라 구입한 차량이었다. 판매자도 교회 교인이자 2세 여성이어서 왠지 모를 믿음이 갔다. 당시 6천 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바로 계약했다.
통장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가는 날, 한편으로는 허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드디어 미국 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이 차는 단순히 이동 수단이 아니라, 두 발 대신 얻은 네 바퀴였다. 자유와 독립, 그리고 가족의 안정을 실어 나르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나는 이제 매일 저녁 주차장 옆 커다란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루틴을 가졌다.
3개월 전의 막막했던 나날들을 회상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은 것에 감사한다.
내일은 또 어떤 당혹스러운 일들이 나를 기다릴까?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3년 중 3개월이 지났고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지만, 이제 시작이다.
다음 편에서는 학생 비자 의무로 인해 시작된 좌충우돌 대학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30대 초반인 내가 20대 아이들과 함께 롱비치 스테이트 대학 랭귀지 스쿨 코스를 다니며 겪은 이야기들을 기대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