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인 그녀
“일을 그만두고 하릴없이 집에만 있다가 문득 멀리로 여행을 가고 싶었어요. 다른 후보지들도 있었지만, 해피투게더란 영화 알아요? 그 영화에서 이과수 폭포라는 곳이 나와요. 그 폭포를 보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해피투게더를 재밌게 봤거든요. 장국영하고 양조위가 나오는 영화인데, 키 작은 배우들이 투덕거리는 게 괜히 기억 속에 남더라고요. 그래서 아르헨티나를 선택했어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원래 계획은 1주일 정도의 여행이었죠. 물론 이과수 폭포를 볼 계획은 없었고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저랑 꽤나 잘 맞더라고요. 그거 알아요? 아르헨티나가 소고기 소비율 1위 국가인 거. 저는 소고기를 엄청 좋아해요. 식문화뿐 아니라, 거리, 건물, 분위기, 냄새, 햇살, 그림자, 사람들, 그곳의 모든 게 좋았어요. 그전까지는 남미 국가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여행 3일 차에 페르디난도를 만나게 된 거예요. 아까 말했던 그 남자요.”
아르헨티나 그녀는 말을 잠깐 멈추고는 앞에 있는 샛노란 빛이 나는 칵테일에 입을 갖다 댔다. 나는 칵테일에 대해 무지하지만, 그녀가 마신 색감이 좋은 그 칵테일의 도수가 높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뿜는 숨에서 알콜 무더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의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다. 무언가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저 눈을 뜬 것이고, 허공에 두 눈이 일시적으로 멈춘 것뿐이다.
“제 얘기가 너무 길어졌죠?” 그녀는 남은 칵테일을 다 들이키며 말했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었어요. 흐름을 따라가기도 바빴거든요. 여행이니, 운명이니, 사랑이니, 미래니, 선택이니, 하면서 말이에요. 이 모든 것들을 얘기하기엔 오늘 시간이 부족하죠. 처음 만난 당신의 시간을 이토록 뺏는 것은 예의가 아닌 거 같기도 해요.”
나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마셨다. 아르헨티나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이다. 오전에 약속을 마치고 집을 가던 길에, 초여름 냄새에 이끌려 부근에 있는 술집에 들어섰다. 나는 맥주를 한 잔 마시며 카운트 바 테이블 위에 달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는 아르헨티나의 경제 위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르헨티나도, 그리고 경제에도 관심이 없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경제 관련 내용이 마치고 다른 뉴스로 넘어가고 있을 때쯤, 어디선가 공기의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바 테이블에 어떤 한 여자가 위스키를 마시며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뒤를 슬쩍 돌아봤지만, 그녀의 시선 테두리 안에는 나뿐이었다. 그녀는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 마시던 위스키 잔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첫 마디는 아르헨티나에 관심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내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자신은 아르헨티나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가족 일 때문에 잠시 들어온 것이란 것도 말했다. 물론 나는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왔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경계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만만한 생김새 때문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혹은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게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지난번엔 지하철에서 모르는 노인의 베트남 전쟁 일화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들은 적도 있다.-
그녀는 위스키를 연달아 3잔을 마시고, 칵테일 2잔을 이어 마시며, 아르헨티나의 여러 정보로 시작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랑했던 한 남자-이름이 이카르디 페르디난도라고 했다.-까지, 몇 시간을 쉬지 않고 얘기했다. 물론 내가 물어 본 적은 없다. 나는 맥주를 연거푸 석 잔을 마시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온 덕분에 맥주가 마시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다음날에 대한 부담이 없었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그녀였다. 전문 아나운서나 이야기꾼처럼 조리 있게 말한다거나, 이야기를 흥미롭게 구성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끄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사실 그녀의 말은 설명서를 제대로 보지 않고 조립한 레고 블럭 덩어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녀의 말 덩어리는 여름의 향기에 잘 어울렸다.
그녀는 미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봄날의 꽃 내음 같은 매력이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남미의 열정적인 햇빛에 의한 구릿빛 피부, 바람에 곱게 빚어진 돌멩이 같은 얼굴, 작은 눈과 동그란 코, 어깨까지 내려오는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 자신의 몸보다 한 치수 큰 자주색 반소매 티셔츠와 빛바랜 청바지, 그리고 진한 감색 샌들까지. 그녀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숲의 풍경처럼 보기 좋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맴도는 기분 좋은 기운은 외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무언가, 직관적인 느낌, 그릇이 가득 채워진 단단함, 멋지게 꾸며진 어떤 공간을 갔을 때 느끼는 분위기 같은 것이었다.-나는 이것의 설명하기를 멈추겠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질서와 순서라는 것을 당최 모르는 새치기꾼 같았다. 어떤 이야기는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먼저 튀어나오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한참 뒤에나 그 내용이 이해되는 것들도 있었다. 그녀의 말은 마치 기억이라는 것이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대해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았다. 번쩍이는 섬광이 남기는 잔상과 얼룩 같은. 그녀의 모든 이야기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아르헨티나와 페르디난도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함께’ 술집을 나왔다. 내가 인사를 하고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나는 하얀 가로등 빛이 잔뜩 묻은 길을 아무런 대화도 없이 걷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둘 다 얼큰하게 취했기 때문이리라. 하늘은 진작에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 낮에 타오르던 태양의 열기가 밤공기에 어렴풋이 남아있다. 달이 몰고 온 선선한 흙냄새는 근사한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려줬다. 여름밤은 술기운을 더 달콤하게 해준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뚜렷하진 않지만, 별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그곳에는 직접 빛을 발하는 항성이 있을 것이고, 그 빛을 반사하는 행성들이 있을 것이고, 인공위성도 있을 것이다. 지구 주변엔 수많은 인공위성이 돌고 있다. 철 뭉치들이 정신이 없이 날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빠른 속도로 지구를 돌며 서로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철 뭉치들을.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 철 뭉치, 또 다른 어디에서 어디로 날아가는 철 뭉치가 마주하는 장면을. 얼마나 찰나의 순간일까. 모르겠다. 그들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우린 아무 말 없이 걷고 있다. 손을 잡지도 않고, 나란히 걷지도 않고, 다른 누군가 우릴 봤다면 서로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하리라.-실제로도 그에 가까운 사이지만- 그녀는 입을 굳게 닫은 채,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걷고 있다. 어쩔 땐 내가 앞서기도 하고, 그녀가 앞서기도 했다. 태풍처럼 수다를 휘몰아치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떠들 수 있는 배터리가 방전된 것일까. 그녀와 나는 30분 정도를 천천히 걷다가 지하철이 지나는 석교 앞에 멈춰 섰다. 누구 하나 멈추자고 말하지 않았지만, 인공적인 빛을 발하며 지나는 지하철을 보자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말보로 블랙 한 개비 꺼내어 불을 붙였다. 여름밤 눅눅한 공기와 구릿한 향이 뒤섞여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고 있다. 나도 더 이상 시선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와 나는 왜 함께 걸었을까. 그전에 그녀는 내게 왜 말을 걸었을까. 나는 왜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까.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녀는 내가 마음에 든 것일까. 마음이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생물학적 반응인 것일까. 마음은 어디 있을까. 그건 존재할까. 나는 습한 저수지에 돌을 던지듯 스스로에게 물었다. 역시 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2년 전에 나를 떠났던 그녀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다. 나도 그녀만큼이나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은 사랑받지 못했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사랑의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일반론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어딘가는-혹은 큰 부분이- 여백의 영역이다. 그것은 허무한 공백이자, 서늘한 공기에 의해 알 수 있는 허공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사실을 몰랐었다. 당신은 항상 다른 곳에 가 있어, 함께 아침을 먹고 대화를 할 때도 말이야, 라고 그녀가 이별을 고하는 날 내게 말했다. 눈앞에 있지만, 손에 닿지 않을 만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난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요.” 아르헨티나 그녀가 담뱃불을 끄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 떠다니던 상념이 바닷속 모래알처럼 천천히 가라앉았다. 아득히 먼 곳까지 갔던 정신이 돌아오니, 그녀는 나를 또렷이 보고 있었다. 정말 동그란 눈이다. 두 눈은 문명의 발전이 닿지 않은 어느 섬의 바닷물처럼 투명하고 선명했다. 그 시선은 무중력에서 나를 지탱해 주었다. 이 모든 기분이 여름밤 탓일 수도 있지만.
“언제 돌아가나요?” 나는 그녀를 마주 보며 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말보로 블랙을 다시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 속에 질문에 대한 말이 떠도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일주일 후가 될 수도 있고, 한참 뒤가 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그녀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페르디난도가 더 이상 거기에 없어도.
“이제 뭘 하고 싶어요?” 담배 연기와 함께 그녀가 말했다.
“당신 집에 가도 되고,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와도 되고, 계속 여기 있어도 좋아요. 아니면 지금 당장 택시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도 좋을 것 같네요. 동해를 못 본 지 꽤나 오래된 것 같거든요. 남미의 바다는 이곳과 달라요.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명확한 답을 드릴 순 없지만요. 어찌 됐든 나와 함께 있어요. 내일의 해가 돌아오기 전까지”
“내일의 해가 돌아오긴 전까지” 나는 그녀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건 힘들 수도 있어요. 술도 엔간히 마셨고, 해가 져서 조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땀도 많이 흘렸고, 여러모로 피곤하네요”
“피곤해요?”
“그럼요. 그리고” 나는 습한 공기와 떠돌던 담배 연기 일부를 들이마셨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당신하고 같이 있어도 될지. 우린 오늘 처음 만났죠. 서로에 대해 잘 몰라요. 물론 당신은 나를 해칠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요. 당신도 내가 해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느끼고 있겠죠. 그러나 안전성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같이 있어야 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에요. 특히.”
“특히?”
“당신은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요. 우리의 만남은 일시적인 거죠. 서로 다른 인공위성이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는 것처럼요”
“인공위성”
“난 어딘가 크게 비어있는 사람이에요. 거기엔 아무도 없죠. 바닥에 구멍이 뚫린-혹은 애초에 바닥이 없는- 그릇 같은 거예요. 누군가 머무르려 들어오면 그대로 빠져나가게 돼요. 떨어진 상대방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치기 마련이에요. 나는 어떨까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저 비어 있다가, 누군가 지나가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거여서, 아무렇지 않아 보이겠지만, 잠깐의 채워짐은 허무와 공백이 더 뚜렷해질 뿐이죠.”
“하지만” 그녀는 담배를 끄고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일시적인걸요. 심지어 무한할 것 같은 우주도 말이죠. -물론 인간의 생명에 비하면 무한한 게 맞지만- 심지어 근처 편의점만 가보면 진열된 상품들에도 유통기한이 적혀있죠. 케첩, 샌드위치, 파인애플 통조림 같은 것들 말이에요. 가치라는 것은 언젠간 상실되기 마련이에요. 번쩍이는 섬광처럼 순간이라도, 그것만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 가치만의 기한이 정해져 있는 거죠. 당신이 단지 시간성에 집착해서 가치의 소중함에 대해 망각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연기를 뱉었다. 연기는 여름밤 하늘 곳곳에 펴졌다. 눅눅한 여름밤, 구릿한 담배 연기, 아직 가시지 않은 취기, 그리고 아르헨티나 그녀. 지금이라는 순간이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건 단지 영화 속 한 장면, 노래 한 구절, 소설의 한 문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 오겠다고 내게 말했다. 나한테도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나는 여기에 있겠다고 말했다.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상념들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리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허기짐이 느껴졌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그녀를 따라 편의점을 갈까,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는 길모퉁이에 앉아 있다. 앞엔 더 이상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석교가 거대함을 과시하며 서 있을 뿐이다. 그녀는 담배를 사고 다시 여기로 올 것이다. 아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대로 아르헨티나로 떠나버릴 수도 있다. 혹은 택시를 타고 동쪽 바다를 보러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없는 내일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