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9일에 쓴 글

막 서른다섯이었을 때

by 무긴이

(1)

햇빛에 반짝이는 풀잎들이 지나간다. 뾰족한 잎은 하늘에 그림을 그리듯 좌우로 살랑거린다. 초록의 풀은 여기서 저기로 끝없이 이어져있다. 끝에 닿으면 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보는 저기에는 뾰족한 풀들이 손에 손을 잡고 흔들거리고 있다. 그 사이를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흘러간다. 지나간다. 스쳐간다. 풀에 닿고 싶지만, 이 풀은 이미 저 풀이 되어 있고, 저 풀은 일시적으로 이 풀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스쳐간다.








(2)


“여보세요.” 그녀에 목소리에 나의 심장은 요동쳤다.


“아, 어, 여보세요?” 나의 목소리는 스스로 느껴질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 다른 게 아니고, 뭐지, 은영이, 아니,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문자, 아니, 연락했어.”




말은 어딘지 모르게 모이지 못하고 공백과 공백 사이로 흩날렸다. 수화기 너머 그녀는 아주 차분했다. 고요하고 일정한 숨소리는 어수선한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사실 예전부터,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은영이하고 너하고 놀이터에 왔었잖아? 내가, 나랑 친구들이랑 앉아있던, 슈퍼마트 앞에 그 놀이터, 기억나? 기억 못하려나, 뭐, 나는 기억나거든, 아주 선명하게, 그,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고, 아니, 중요한가, 아무튼 그때부터, 너를 처음봤는데”



나는 혼란스러운 입술을 닫았다. 수화기와 수화기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 그 한마디가 어려웠나보다. 그 한마디가.








(3)


누군가에게 줄 꽃을 꺾으며, 그 꽃에게 미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인간이고 너는 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너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꽃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인간이다. 그리고 너를 여기에 피우게 한 것도 어떤 인간일 것이다. 너의 목숨을 끊은 것도 나라는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내가 꽃이 되고, 인간 같은 존재가 나타난다면, 내 목이 꺾여가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일 것이야. 나는 겸허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이야. 나는 꽃이고, 당신은 인간이기 때문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야.






(4)


최근에 버스를 기다리며 주머니에 있던 문고본을 꺼내어 읽은 적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라는 책이었는데, <인간 실격>을 나름 흥미롭게 보고, 바로 이어서 서점에서 샀던 책이다. 문고본은 코트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크지 않았다. 문고본을 펼쳐 읽고 있었던 페이지를 찾았다. 그리고 한 페이지를 뒤로 넘겨 다시 읽어 내려갔다.




‘”어머니, 전 요즘 생각하는 게 있어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점이 뭘까요. 언어도 지혜도 생각도 사회 질서도 각각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다른 동물도 모두 갖고 있잖아요? 신앙도 갖고 있을지 몰라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지만, 다른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도 없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어머니, 딱 한 가지 있어요. 모르실 테죠? 다른 생물들에게는 절대로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건 바로 비밀이라는 거죠. 어때요?”



어머니는 발그레한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아아, 가즈코의 그 비밀이 좋은 결실을 맺어 준다면 좋을 텐데. 엄마는 매일 아침, 아버지께 가즈코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단다.”



내 가슴에 불현듯 아버지와 나스노를 드라이브하다 도중에 내려서 보았던 가을 들판의 경치가 떠올랐다. 싸리꽃, 패랭이꽃, 용담, 여랑화 같은 가을꽃들이 피어 있었다. 개머루 열매는 아직 파랬다.’




나는 미묘하지만 통 큰 진동을 느꼈다. 공기가 매질이 되어 내게 닿은 것 같았다. 문고본 종이 위에 떠돌던 시선은 여기에서 저기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도로와 파란 하늘 뿐이었다. 버스는 아직 올 모양이 아닌 것 같으다.